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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May 22. 2024

잔업

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처음 이 일을 시작한 날이 떠오른다. 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물에 넣는 순간 누군가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수증기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말쑥한 옷차림과 깨끗한 신발을 신은 남자였다. 난 집게와 망치를 내려놓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헝겊으로 대충 손을 문지른 뒤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자네 혹시 다른 일을 생각은 없나? 보수는 지금보다 훨씬 넉넉하게 받을 수 있을 걸세."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열세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맞아가며 배운 쇠질뿐이라 난 어리둥절했다. "어르신. 저는 10년 넘게 쇠를 녹이고 두드리는 일만 해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시키신다는 건지요."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일은 아니네. 그저 법에 의해 처분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범죄자들을 저쪽으로 보내주는 일일세." 저쪽?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게로군.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사형을 준비하고 집행하는 일이란 말일세. 사형이라는 말에 너무 심한 거부감을 갖진 말게나. 이건 위대한 우리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은 대단한 애국자라고 볼 수 있지." 그때까지 난 대장장이라는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배운 기술이 그저 쇠질뿐이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망치질을 반복했을 뿐이다. 게르만들이 곧잘 내세우는 소명의식 따위는 내 안에 전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애국심이라는 낯선 단어는 깊은 울림과 함께 다가왔다.

 남자와 함께 작업실을 떠나 걸음을 옮긴 나는 어느새 런던 타워 앞에 서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런던 타워의 위압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자네도 잘 알겠지만, 여긴 여왕께서 가끔 묵는 곳이네. 항상 언행을 조심해야 할 걸세. 까딱하다간 자네가 집행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하하하. 농담일세. 농담."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지기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비장한 얼굴의 문지기는 한층 진지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경례를 한 채, 우리를 통과시켜 줬다. 타워 안으로 들어온 후에도 남자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난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갔기 때문에, 타워 안의 풍경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는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나를 외진 방으로 데려갔다. "서로 인사들 하게. 그리고 업무와 관련하여 인계할 사항은 오늘 중으로 마무리해 주게나."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뭔가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듯 서둘러 방을 나가버렸다.

 방에는 북 쪽으로 작은 창문이 하나 뚫려 있었지만, 그건 있으나 마나였다. 흐린 날씨 탓에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오히려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이 더 밝아 보일 정도였다. 촛불을 등지고 누군가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제이미입니다. 제이미 스미스. 잘 부탁드립니다." 어색한 침묵 끝에 잔뜩 쉰 목소리가 반응했다. "자네가 내 후임구만. 이제 나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겠어." 대화인지 혼잣말인지 헷갈리는 발언 끝에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웅크리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그는 상당한 거구였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악수하자며 내민 손가락은 내 손바닥을 완전히 감싸고도 남았다. "상당히 고된 일을 한 모양이구만.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머지않아 그 일을 간절히 그리워하게 될 걸세. 갑작스럽겠지만 오늘 세시에 사형집행이 예정되어 있네. 그게 내 마지막 임무야. 자네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나게. 나와는 다르게 준비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볼 수 있으니까 말일세."

 솔직히 말해,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숫돌을 이용해서 도끼를 날카롭게 갈던 그의 뒷모습만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몇 번의 집행을 끝내고 나자, 난 사수의 예언처럼 대장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누군가를 저쪽으로 보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끔찍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피워보지도 못한 젊은 생명을 앗아갈 때면, 심한 악몽에 시달렸다. 그것도 며칠 밤을 새워가며 말이다. 2년쯤 지났을 무렵, 나를 선발한 남자를 찾아가 놓아 달라고 간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형집행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만둘 수 없었다. 그리고 난 그 특별한 경우에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을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자, 난 살기 위에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래. 난 프랑스와의 전쟁에 선발된 용감한 군인이다. 이건 위대한 영국을 위하는 일이고, 무엇보다 애국심이 있는 자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처음 만난 날 남자가 언급한 애국심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애국심은 조금씩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많은 적을 죽이는 건 오히려 명예로운 일이다. 거기에는 생각과 동정심이 피어날 여지가 없다. 그저 적이 앞에 있고, 앞에 있는 적은 자연스럽게 죽여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 뒤로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오늘 같은 상황은 처음이다. 하루에 두 명이라니. 그것도 아버지와 딸. 오전 10시에 있었던 아버지의 집행은 꽤나 번거로웠다. 사형대로 향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떨리는 일일 테지만, 그는 두려움보다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죄목을 읊는 관리에게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퍼부었으며,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사제에게조차 침을 뱉었다. 결국 끝까지 목을 내려놓지 않아서 시종들이 줄을 묶어 억지로 무릎을 꿇린 다음에야 간신히 형을 집행할 수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저주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난 그저 최대한 고통 없이 저쪽으로 보내준 것뿐인데.

 내가 이 일을 시작한 후로 많은 이웃들이 형이 집행되는 광경에 대해 물어왔다. 런던 타워의 폐쇄성 때문에, 그들은 귀족의 죽음이 우리와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막연한 생각은 근거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내가 집행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 앞에서 극한의 두려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간혹 사형대까지 침착하게 걸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람조차도 사제의 기도가 시작되면 온몸을 벌벌 떨곤 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청했다.

 조용하게 사형대 쪽으로 걸어오는 딸의 얼굴을 보자, 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동안 수없이 집행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그저 아버지와 같은 날 죽는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딸의 뒤로는 두 명의 여인이 뒤따르고 있었다. 한 명은 아기 때부터 키워준 유모로 보이고, 다른 한 명은 시녀처럼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있다. 지금 죽는 사람이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사형대 위에 선 딸은 시녀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시녀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원망하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은 듯 보였지만, 딸은 시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살며시 가로 저였다. 어느새 붉은 드레스는 사라지고, 새하얀 속옷만 남았다. 잠시 후 딸은 꼿꼿이 선 채, 의연한 모습으로 조용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너무 차분한 음성 때문에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기도 마지막에 겨우 들린 말은 불쌍한 아버지를 굽어 살펴달라는 내용이었다. 딸의 기도가 끝나고 관리가 죄목을 읊기 시작하자 내 감정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분이 제인 여왕님이라고? 저렇게 여린 분이 어찌 왕위 찬탈의 대역죄를 저지르실 수 있지? 게다가 현 군주께서 개종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시겠다고 했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그깟 종교가 도대체 뭐라고 하나 뿐인 목숨을 내던진단 말인가.' 인자하신 군주께서 눈가리개를 허락하셨다는 관리의 말을 끝으로 늙은 사제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형식적인 기도를 들으며, 난 속으로 읊조렸다. 제발 한 번에 고통 없이 끝나게 해달라고. 딸은 사형대 앞쪽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마침내 시녀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눈가리개를 썼다. 목이 놓일 곳을 더듬더듬 찾는 딸의 모습은 마치 눈먼 백조를 연상시켰다. 어느새 기도를 끝낸 늙은 사제는 딸에게 다가가 부축하며, 천국으로 가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문지기에게 부탁해서 겨우 밖으로 나온 나는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며 몇 번이나 속을 게워냈다. 잔뜩 흐린 런던의 2월은 사방이 어두웠고, 탁한 템즈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유모의 눈물만큼이나 처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눈가리개 밑으로 드리워진 농밀한 음영은 그녀의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했고, 무엇보다 떳떳했다. 수년에 걸쳐 여러 사람들을 집행한 내가 제일 잘 안다. 여왕은 군주답게 끝까지 신념을 지켰으며,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결백한 주인을 집행한 나는 더 이상 프랑스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용감한 군인이 아니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잠시 후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지금이야 말로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야 할 때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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