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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Aug 16. 2024

제물

 산은 고요했다. 흔한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난 분명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숲 속의 모든 생명이 숨죽인 채 지켜본다는 것을. 녀석을 흥분시키지 않으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지만, 곧 우릴 발견한 놈은 우뚝 일어서서 거칠게 숨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얀 숨만큼이나 길게 자란 엄니를 위아래로 휘둘렀다. 겨울을 맞아 수북하게 자란 털은 목덜미부터 꼬리까지 꼿꼿이 세워져 있었고, 뻘겋게 충혈된 눈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극도로 흥분한 녀석은 우릴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지만, 닿을 수 없었다. 뒷발에 걸린 올무 때문이다. 올무는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고, 격렬한 몸부림 탓에 놈의 발목부터 발톱까지 흥건하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흥분한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하얀 눈 위에 여기저기 붉은 꽃이 선명하게 피어났다. 분명 녀석은 덫에 걸려있건만,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언제라도 다리 한 개쯤은 간단히 포기하고 날 해치울 기세였다. 며칠 전부터 수도 없이 상상한 순간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있는 녀석을 보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난 그저 귓가에 울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빨리 올가미 가져오지 않고 뭐 해!" 정신을 차려보니 왼쪽 뺨이 얼얼했고, 아버지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날 다그쳤다. 난 서둘러 발치에 놓인 올가미를 주워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는 긴 막대 끝에 올가미를 고정하고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놈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덫을 고정시킨 나무 주변을 빠른 속도로 치받았다. 그렇게 놈은 죽음의 반경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들어와 보라는 듯이. 아버지가 어떻게 날뛰는 놈의 앞발에 올가미를 걸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자 죽음의 반경은 깨끗이 사라졌고, 녀석의 앞발을 묶은 올가미는 반대쪽 나무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놈의 눈과 턱 아래로 하얀 천이 칭칭 휘감겨 있었다. "모든 짐승은 눈을 가리면 얌전해지지.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란다." 아버지는 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붙을 붙였다. 깊숙이 빨아들여 뱉은 연기는 잔뜩 흐린 하늘 속으로 스며들었고, 난 담배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생각보다 푸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기러기가 울며 날아가는 쪽을 흘끗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곧 어두워지겠구나. 우선 다리부터 묶자" 시각을 빼앗긴 녀석에게서 더 이상의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끙끙대며 뒷다리를 묶는 동안 아버지는 벌써 앞다리를 묶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듭이 많이 늘었구나. 이제 기도를 올리자." 우린 녀석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산군님. 오늘은 제 아들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이 녀석을 물로 바치오니, 부디 제 아들을 굽어 살피옵소서." 머리를 조아리는 아버지의 목에 감긴 목걸이가 보였다. 아버지가 내 나이 즈음 잡은 놈의 엄니로 만든 목걸이. 그때 녀석에게 가슴을 받혀서 생긴 상처와 바꾼 소중한 물건.


 녀석은 뒤집힌 채로 숨을 헐떡였고, 난 앞다리 사이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털과 두꺼운 가죽으로 뒤덮여 볼 순 없지만, 내 심장과 똑같은 것이 분명 거기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몸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이 멈추면 모든 게 끝이지. 오늘 넌 이 놈을 확실하게 끝냄으로써 인정받는 거다. 다시 새롭게 태어났음을."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 순간 날카로운 꼬챙이를 들고 있는 쪽이 나일까. 사지를 포박당한 채로 버둥거리는 게 혹시 나는 아닐까. 그건 직접 팔을 뻗어 찔러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한 번에 끝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난 천천히 녀석의 심장을 겨눴다. 그리고 온몸의 체중을 실어 지그시 눌렀다. 곧 놈의 몸은 이질적인 물체에 반응해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를 때마다 녀석의 진동은 착실하게 약해졌고, 난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곳에서 끝을 맞이하는 쪽은 내가 아니었다. 난 안도의 한숨을 쉰 채 아버지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꾸에에에에엑! 꾸에에에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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