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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Sep 10. 2024

선물

 우리는 살아가면서 꽤 많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특히 다둥이 아빠 입장에선 입학, 졸업,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나만 쫄리는) 결혼기념일 등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날이 차고 넘친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매번 뭘 사야 하나 고민했지만, 요즘은 정말 간단하다. 신사임당 누님으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아이들이 토스뱅크를 사용하기 시작한 뒤로는 비대면이다. 금융앱을 켜고 간단한 조작을 거치면, 내 잔고는 -50,000원 아이들의 잔고는 +50,000원. (대상이 아내라면 × 20) 뒤이어 발송하는 영혼 없는 축하 메시지. 네 입장에서도 그렇게 처리하는 게 편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다. 실제로 매우 편하기 때문이다.

 선물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이다. 물건은 보통 화폐로 치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받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돈을 받는 게 딱히 문제가 되진 않는다. 본인이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는 셈이니까. 하지만 돈을 선물 받으며 감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금액이 아주 크면 행복한 눈물이 흐를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 아이들만 도 무미건조한 인사가 끝이다. "아빠! 고마워. 오래오래(?) 살아야 돼." 누군가를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과 돈이 과연 등가물일까?  직접 준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선물은 생각보다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받는 사람이 성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사람의 취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이미 갖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이는 많은 시간과 관찰이 요구되는 작업이며, 애정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찰이나 상품권을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다. So simple하니까.

 오늘 출근길에 라디오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선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선물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선물은 바로 수첩이다. 너무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고등학교 2~3학년 때로 기억한다. 어느 날 친구는 선물이라며 수첩을 내밀었다. 휴대하기 편한 사이즈였고, 분홍색 하드 커버 위에는 Confident Man이라는 글자와 느낌표 모양의 캐릭터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수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한테 도움이 될까 싶어서 틈틈이 정리한 거야." 친구의 말을 듣고 펼친 수첩 위에는 영어 단어와 숙어가 적혀 있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단 한 줄도 빠짐없이 빼곡하게 적힌 친구의 글씨를 보며, 난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당시에는 빵이나 사주지 뭘 이런 걸 선물하냐며 친구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런 엄청난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춘기 남학생이라 쑥스러웠던 것 같다. 당시 영어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나는 친구가 준 단어장을 항상 교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마치 부적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졸업 때까지. 친구의 따뜻한 마음 덕분인지, 난 99학년도 수능 외국어 영역에서 만점을 받았고 요즘도 아이들을 훈육할 때 잘 써먹고 있다. "아빠는 말이야 어! 집안이 어려워서 영어 학원을 못 다녔는데도 외국어 영역 만점을 받았는데 어! 니들은 어어!"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맨날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아빠가 실은 꽤 똑똑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막내의 눈빛을 느끼며 흐뭇해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단어장과 같은 선물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의 말처럼 인생은 큰 초콜릿 박스라고 믿는다. 그리고 긍정적인 자세로 인생의 모든 사건을 음미하다 보면, 언젠가 또 한 번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다. 요즘도 가끔씩 우울할 때마다, 친구가 선물한 단어장을 펼쳐본다. 소중한 내 친구는 알까? 그 단어장이 치열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단어장만큼은 보물처럼 챙겼다는 사실을. 긴 세월이 흘러 연필로 꾹꾹 눌러쓴 단어는 흐려지고 있지만, 그곳에는 지난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간절히 목표를 이루고자 했던 나와 묵묵히 곁을 지켜주던 네가 손을 맞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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