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손가락을 멈추고 그대로 엎드려 스르륵 잠들고 싶다. 며칠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면시간이 OECD 회원국 중에서도 짧은 축(7시간/일 이하)에 속한다는 기사를 봤다. 누군들 충분히 푹 자고 싶지 않겠는가? 그저 이런저런 이유로 잠을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나 역시 잠을 줄여야 하는 이유가 있을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불명예스러운 국가 기록에 일조한다는 사실이 썩 달갑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설 연휴 바로 전날 밤 막내는 극한 다이어트를 선언했다. 목표 몸무게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겠다는 막내의 비장한 표정 위로 시가를 물고 있는 처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국 출신의 록밴드 그 윈스턴 처칠 말이다. 세상에 담배를 끊는 것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나? 난 수십 번도 넘게 끊어봤는데.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냐는 나의 질문에 막내는 어느 날 씻는데 불룩 튀어나온 배가 갑자기 거슬렸다는 답을 내놓았다. 임신 아닌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게 약 2년 전이었으니, 그동안 눈을 감고 씻은 게 아니라면 무언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답변이었다. 사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부부는 막내가 너무 마른 게 아닐까 걱정했다. 그 시절 막내의 팔은 가느다란 막대기 같아서, 가끔 보는 친척들이 모두 입을 모아 비쩍 골았다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모든 음식이 다 너무 맛있다는 첫째가 본격적인 살크업을 시작하면서, 덩달아 막내도 질 수 없다는 듯 통통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 결과 첫째는 108kg, 막내는 58kg. (둘째 48kg)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몸무게 끝자리를 8로 통일한 (라임)남매들의 우애가 새삼 대견하지만,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무한의 상징인 8을 행운의 숫자로 생각하는 중국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튼 막내가 무한히 먹는 쪽이 아닌, 체중 감량을 선언한 시점에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딱 두 가지였다. ① 운동 학원에 등록할 돈을 부담하고, 아빠로서 응원한다. ② 운동 학원에 등록할 돈을 부담하고, 아빠로서 응원하며 라이딩을 도맡는다. 당연히 난 차악인 1번을 원했지만, 터미네이터는 단호했다. 평일은 막내가 공부 학원 뺑뺑이를 돌아야 해서, 그 시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종목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터미네이터의 고민 끝에 종목은 막내의 평발에 무리를 주지 않고, 운동 학원 중 드물게 새벽부터 문을 여는 수영으로 결정되었다. 학원비 부담, 5시 20분 기상 및 라이딩까지 내가 모두 도맡는 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냐며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응원은 엄마의 몫이며, 무엇보다 방학만큼은 곰처럼 겨울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는 게 (진짜) 이유였다. 대놓고 희토류를 요구하는 악당을 바라보는 前 코미디언의 마음도 나와 비슷할까?
솔직히 2월 초반에는 별다른 기대를 품지 않았다. 작년 6개월에 걸쳐 첫째를 수영장에 보낸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혹독한 새벽 훈련 덕분에 입맛은 더욱 좋아졌고, 첫째는 그냥 비만이 아니라 건강한 비만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올라가는 자신감과는 반대로 떨어지는 성적은 덤이었다. 새벽에 운동하고 학교 가서 숙면을 취했으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막내는 달랐다. 라면, 탄산음료, 기타 간식을 모두 끊고 하루에도 몇 번씩 15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렸다. 심지어 좋아하는 유튜브도 베란다에서 스테퍼(AKA 천국의 계단)를 밟아가며 시청했다. 처음에는 열렬히 응원하던 터미네이터가 어느 순간 진짜 목적은 유튜브를 마음껏 시청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했을 때도 막내는 굳건했다.
7시 10분 오늘도 수영장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걸어 나오는 막내의 모습을 보았는데,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카운터 근처에 놓인 드라이기로 막내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는데 아들이 말을 걸어왔다. 아빠! 나 sub-fifty 달성했어. 활성화되지 않은 머리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마라톤의 sub-three를 빗댄 표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 막내는 2월 한 달 동안 본인 몸무게의 14%를 감량한 것이다! 새끼 하프 물범이 고지방 모유를 먹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몸집을 불린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인간이 한 달 만에 이런 성과를 달성했다는 얘긴 처음 들어봤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정치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을 때, 평소 같으면 대충 대답했을 텐데 이번에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 최대한 정성껏 답변해 주었다. 그렇게 하는 게 지난 몇 개월 동안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한 아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빠 말은 틀린 게 아니라 다름이 있는 영역이라는 얘기지? 나의 의도를 순식간에 파악한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치적 편 가르기를 하는 지인들이 떠올랐다. 당최 중학생도 이해하는 다양성을 그들은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가치는 상대적이며, 자신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손바닥 뒤집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을. 그들이 주장하는 신념의 영역이 실제 누군가에게는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보다 가벼울 수 있음을 말이다. 아이의 1년은 어른의 5년과 맞먹는다는 말처럼, 2025년을 충실하게 보낸 막내가 내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날 놀라게 할지 궁금하다. 그 놀라움이 긍정적이면 좋겠지만, 설사 부정적이어도 상관없다. 그런 모든 경험이 한데 모여서 막내를 더욱 단단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거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