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precious
이거 써도 되나? 하필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3악장이 시작되려 하는데 훼방이라니. 윤기가 좔좔 흐르는 야생마를 연상시키는 김봄소리의 연주를 들으며, 난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아내가 지난여름과 달라진 점은 내 사각 빤쓰 대신 무릎이 잔뜩 해진 츄리닝을 입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내는 기묘한 각도로 구부린 검지를 활용하여, (집밖에서는 절대 쓰지 않는) 뿔테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 나한테 짜증 내는 거야? 결혼 생활 내내 터미네이터의 심기를 잘못 거슬렸다가 수도 없이 낭폐를 봤던 나는 비즈니스 친화적인 미소를 만면에 띠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이어폰 빼다가 어디에 줄이 걸려서 그랬지. 아내는 지금 너는 무선 이어폰을 쓰고 있는데 무슨 해괴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다시 질문했다. 이거 내가 써도 되냐고.
아내가 내민 손위에는 얍쌉하게 생긴 볼펜이 놓여있었다. 처음에 난 아내가 파놓은 함정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각 빤쓰처럼 극도로 개인적인 물건도 아무 허락 없이 쓰는 아내가 평범한 볼펜의 사용권을 굳이 물어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난 살아남기 위해 머릿속을 재빠르게 회전시켰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5월에는 가족 중 어느 누구의 생일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기념할만한 날도 없는 평화의 달이다. 기억 안 나? 이거 네 보물상자에 있던 거야. 얇실하게 생긴 카키색 볼펜이 도대체 왜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일단 잡아떼기 시작했다. 크록스에서 쓰레빠 말고 볼펜을 만드는진 몰랐네. 아내는 마흔 중반에 벌써 노안이 온 남편이 딱했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크록스가 아니라 크로스거든.
난 어릴 적부터 무언가 간직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매일 쓰는 물건이 아닌 이상 없어져도 잘 모를뿐더러 딱히 불편을 느끼지도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평생 간직하고 싶은 물건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작은 상자를 하나 마련했다. 거기에는 친구가 정성스럽게 써준 단어장, 대학 수험표, (당첨된) 청약통장 등 기억하고 싶은 물건이 가득 들어있다. 혹시 핵전쟁이 벌어져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자 하나만 챙기면 될 정도로 엄선한 물건만 넣어뒀는데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그게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니.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아무튼 대충 헤아려 봐도 100개가 넘은 볼펜이 집안에서 굴러 다니는데 굳이 내가 따로 보관한 걸 써야 하나 싶었으나, 일단 난 볼펜의 사용권을 아내에게 양도했다. 무엇보다 목숨이 제일 중하니까. 아내가 어디론가 가고 남은 연주를 듣는 내내 볼펜에 얽힌 스토리를 떠올렸지만, 정말 신기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보물상자에 들어있다는 건 분명 내가 무척 아낀 물건이라는 뜻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뿐이다."
물질, 신념, 인간관계 할 것 없이 모든 건 시간이 흐르며 변하기 마련이다. 볼펜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을지라도 그걸 대하는 내 마음이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마음이 바뀔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그들은 심각한 도취에 빠져 자신이 믿는 것만 옳다고 주장한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여기저기서 출몰하여 다른 사람의 '선호'에 대해 강요하는 이상한 사람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치야 말로 수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즉 상대적으로 잘 변하지 않는 신념과 가장 거리가 먼 주제가 아닌지 말이다. 꽉 막힌 출퇴근 대로변에서 특정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는 사람은 그나마 낫다. 그들은 단순히 돈을 벌고 있는 것뿐이며, 안 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정치적 편향을 드러내면 무척 불편하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는 별로 관심 없는 주제라고 좋게 얘기했는데도 막무가내로 가르치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다음 세대를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둥. 특정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는 둥.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세상이 진보와 보수의 가치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들이 당신보다 멍청해서 그럴까? 부디 본인이 옹호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다고 해서 상대방을 폄하하는 오만함을 드러내지 않길 바란다. 다수의 의사결정은 당신보다 훨씬 똑똑하며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선 후보들의 토론을 보면서 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지난번처럼 이 놈도 별로고 저 놈도 별로기 때문에 엉뚱한 놈을 뽑을 게 아니라, 차라리 그 날 아내랑 맛있는 걸 먹으러 가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