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 마나 한글

세 번째 열 살로 살아가기

by 반윤성
글은 왜 쓰는가?

초등학교에서 다들 일기를 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방학 숙제를 일기로 준 이유를 어른이 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하루를 되짚어보며 기뻤던 일, 슬펐던 일, 가족과 친구 이야기, 날씨 이야기와 같은 시시콜콜한 하루의 일상을 기록해보며 많은 추억을 쌓으라는 의미일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일기는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에 따라 대부분의 장르를 망라하는 온전한 형태로 완성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은 이렇지만 역시 내 첫 번째 글은 미루고 미루다가 3일을 남겨두고 부랴부랴 써낸 글이다. 어설픈 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00년대의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이라면 그때 학교의 분위기가 대충 어땠는지 짐작하리라.


시끌벅쩍한 방학식의 공기와 달리 개학식에서는 전운과도 같은 냉랭한 공기가 감돈다. 차례대로 방학 동안 자신이 이뤄온 전리품들을 출품하게 되는데, 성실하게 과업을 해온 친구들은 안심하지만 우리와 같이 부랴부랴 작업물을 낸 부류들은 겉으론 아닌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떨고 있었다.


지금 아이들에게 얘기하면 머나먼 과거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체벌이 횡행할 때다. 누가 소문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반 누구가 두들겨 맞았다더라, 귀를 당겨 공중부양을 시켰다더라와 같은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아마 무서움에 숙제를 하는 친구들도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글을 쓴다는 것

애초에 초등학생은 글을 쓰려는 생각이 없다. 그 아이가 글을 쓴 이유는 그것이 해야 할 일이며, 안 하면 무서운 일이고, 잘하면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이어서다. 마치 어른들에게 빗대어 보자면 '일'과 같은 것이다. 먹고살기 힘들고 냉혹한 현실의 두려움에 일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런데 아이는 자라나 어느샌가 누가 쓰라고 하지 않았는데 글을 쓴다. 그 글은 연애편지가 될 수도 있고, 맛집 블로그 포스팅이 될 수 있으며, 다이어리가 예뻐서 샀는데 내친김에 쓴 일기가 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글을 쓰게 되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아마 역설적이게도 시키지 않아서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말은 떠다니는 존재로써 어떤 귀가 듣느냐에 따라 자유로이 편집된다.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처럼 듣기에 따라 달라지는 게 말이라는 표현 수단이다.


글은 듣는 사람이 없어도 내가 내키는 순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쓸 수 있다. 물론 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말 따로 생각 따로 적어야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말과 생각이 같으니까 적으면서 정리도 되고 나중에 들춰보기도 좋다.


쓰나 마나 한글

만약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면 아이들이 쓴 글을 모두 읽어 봤을까? 아니면 그저 다 썼는지 안 썼는지 확인만 했을까? 내가 학교를 다니던 00년대 초반만 해도 한 학급에 40명 가까이 있었으니 그들이 쓴 글을 모두 읽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많은 양을 채운 친구들을 '수'를 받고 거의 안 쓴 친구들은 '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채점이 끝나 점수로 환원되고 나면 이제 그들이 쓴 글들은 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그들이 쓴 글은 글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성실하게 해냈든 미흡하게 해냈든 모두 의미가 있는 하나의 글일 테다.


가끔 작가들이 글을 쓰며 이건 쓰나 마나 한글이라는 생각을 한다던데, 쓰나 마나 한글이란 게 세상에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상업작가도 아니고 그저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색칠 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쓸모없어 버려져야 할 글은 세상에 없다.


뛰어난 작가와 훌륭한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일 테지만 좋은 작가는 독자가 듣고 싶어 할 만한 재밌는 글을 써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글의 장르와 주제가 어떻든 글쓴이는 읽는 사람의 시선을 배제한 체 나만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글은 글로써 누군가에게 어떤 이해관계없이 읽힐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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