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Mar 06. 2023

뭐가 다른데

난 왜 안정을 갖지 못해서

노트북 어딘가에 써놨지만 내겐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는 답장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사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아. 애초에 돌려받기 위해 쓴 게 아니니까. 내 입에 쓴 기억들을 어떻게든 뱉어내야 한다는 달콤한 자기 합리화도 일정 부분 있었어. 다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걸 알릴 수 있는 내 수많은 필살기 중 하나가 하필이면 그때는 편지였어. 도시락통은 그날 설정한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은 정말 우연이었고.


날 좋아한다면서 왜 내가 맞춰주길 바라는 거야. 네가 날 맞춰야지. 그 말에는 백번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그게 내 흑심의 전부는 아니야. 짝사랑을 전하는 남자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만약 내가 너였다면 이렇게까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지금처럼 무심하게 굴진 않을 거 같은데. 네가 상상하는 안정적인 남자로부터 내가 너무 먼 거리에 있다는 것도 아는데 그 모습도 내 일부에 불과하다니까.


이제 인간은 100세까지도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는데 사랑의 생애는 대체 왜 가늠조차 안될까. 내 마음이 고작 한 달짜리라고 말하기에는, 심지어 그게 정말 딱 33일 정도의 수명이었다 해도 나는 그 어떤 사람보다 널 열렬히 사랑한 게 맞는데. 그 진심마저 채점받으려 답안지를 건네는 건 아니지만 억울해. 억울하단 말조차 이젠 너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어. 나는 내가 모르는 네 일상의 전부를 질투해.


네가 예뻐서 좋아한다는 그 유일한 이유는 계속 함구할걸. 아마 너에게도 정답에 가까운 말이었을 텐데. 내가 너무 의식적이었나? 그날 잘려나간 장면들이 수없이 많은 걸 봐선 솔직한 태도였을 거야. 넌 정말 너무 예쁘게 생겼어. 두 개의 커다란 크레이터를 가진 긴 달 같은 얼굴. 네가 머리를 묶는 걸 훔쳐볼 때마다 난 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 황홀해서 숨이 콱 막혀. 넌 아마 모르겠지. 그때마다 너를 작은 눈으로 곁눈질만 하니까.


뭐가 그렇게 슬펐길래 널 껴안고 펑펑 울었을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절규로 바꾸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 오히려 나는 분노가 더 어울리는 사람인데. 두꺼운 패딩을 입고도 네가 토닥여주는 손길을 오롯이 느꼈어. 내가 이걸 원해 울었던 건 아닐까. 또 쓸데없는 순서나 따지고 있네. 놀이터로 가는 길에서 우리가 털썩 주저앉았던 새벽, 난 네가 우는 모습을 쳐다보지도 못한 겁쟁인데. 너는 정말 얼마나 더 대단한 사람인 걸까.


결국 나는 널 한 번도 맞춰주지 않았던 거야. 오히려 날 맞춰준 건 너였지. 제발 날 보라니. 내가 너에게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나.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과 행동들이 죄스러웠다는 걸 쓰면 쓸수록 벌게지는 얼굴이 방증하고 있어. 몇 개의 단어로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면 정말 볼장 다 본 거라던데. 나는 언제까지 너에게 이런 추함만 보여줘야 하는 걸까. 그렇게 절하하기에 난 너무 좋은 사람이 맞는데. 넌 날 놓치면 안 되는데.


내 마음에 여러 개의 잠금장치를 채워놓은 지도 어느덧 13년이나 됐어. 너도 이젠 어렴풋이 알겠지만 나는 압도되는 상황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아니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행동하기 위해 나만의 선을 여러 개 그어놓았어. 이걸 넘어가면 난 정말 끝이야.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비겁함이 왜 너한테도 작용하는 걸까. 너 하나로 무방비하게 해제되는 자물통을 보며 방향이 엇나간 예민이 고개를 내밀었어.


네가 어떤 찌질이들을 만나는지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전부 신경 쓰고 있어. 거기에 네가 있는데. 수 천 번 줄을 세워 봐야 내가 낫다는 걸 미친 듯이 외쳐도 그게 너한테 닿지 않는다는 게 가장 유요한 변수야. 걔네도 네가 노들섬에 사는 다람쥐 같이 귀여운 사람이라는 걸 알까. 난 널 나무에 걸어버린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 쪽팔린 시샘을 전부 매달아 버리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이번엔 진짜로 날 믿어. 우리는 다르지 않아.


내가 변명처럼 말했던 뇌와 마음에 대한 애프터서비스. 곰곰이 돌이켜볼수록 뇌는 너한테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마음은 언제나 너라고 말하니, 난 이제 물리적인 몸의 반응을 믿기로 했어.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처럼 회복불능 직전까지 내가 아프다면 그때는 정말로 어딘가 고장이 난 거겠지. 꿈은 이제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까지 도달했거든. 네가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새벽이 너무 기뻤다가도 괴로운 단계야.


내가 그런 멍청한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소개팅을 나가지 않았을까.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분명 똑같이 행동했을 사람이지만 궁금해. 그날따라 화가 가라앉지 않아 찾은 한강에서는 왜 그리도 길을 묻는 사람이 많은지. 저도 모르겠어요를 한 다섯 번 말하고 나니 문득 내가 길을 잘 알 것 같이 생겼나? 싶었어. 네가 너무 보고 싶은 미세먼지가 심했던 밤, 극적으로 가로등이 켜졌는데 메시지 창은 텅 비어 있었어.


서울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했구나. 난 여기가 그리 지겹지 않았는데. 차갑게 얼어가는 오른손을 절실히 느끼며 내가 그날 놀이터에서 가장 후회했던 건 이럴 줄 알았으면 면허를 따놓는 건데, 하는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않았을 후회였어. 쏘카 따위를 빌려서 너한테 드라이브 갈래? 핑계라도 대는 건데. 당산과 선유도 사이 그 어딘가가 너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구나. 넌 2호선을 타고 어딜 방문한 걸까.


그렇게까지 예쁘게 하고 있을 준 몰랐지. 바보야. 이게 왜 내 잘못이야. 그래 그래, 내 잘못이 맞아. 네가 추천해 준 <유령의 마음으로>가 그날 오후, 집에 배송되지 않았더라면. 울적한 망고 같은 표현에 눈물이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어떻게든 친구라는 핑계로 좋아하는 마음을 숨긴 여러 만남을 이어갔을 텐데. 네 수많은 남사친들처럼 난 그럴 수가 없었어. 내가 원래 그래.


나한테도 그 말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허함을 넘어선 무력함이 날 얇게 도포하는 괴상한 느낌 때문에 연옥에 갇혔어. 내가 가지지 못한 안정은 이번 생에는 어려울 거 같은데. 다만 나는 이번 기회마저도 놓친다면 정말 내 삼십 대에서는 끝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는데. 보고 싶은데. 아, 그냥 좀 순순히 나오시죠라는 말이 이제는 수백 번 다듬어야 건넬 수 있는 말인데.



매거진의 이전글 시절연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