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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n 30. 2024

Bridal Shower

침착맨이 텅 빈 눈으로 맨날 하길래 나도 포케로그를 해봤다.

확실히 머리를 비우고 시간을 보내기에는 로그라이크만 한 게 없다.

문득문득 불쑥불쑥 찾아오는 기억이 있지만 굳이 들추진 말아야지.

곧 비바람의 고삐를 쥐고 장마가 기습 방문할 테니 그때야말로 꽁꽁 숨어서 끅끅 울어야지.

그리고 빗소리와 이따금 섞이는 층간소음을 숨기기 위해 감스트를 봐야지.


연희동에 갔다.

돈 많이 벌어서 여기 어딘가 큰 통창을 가진 작업실 하나를 얻으면 정말 행복하겠다.

내가 좋아하는 걸 (뭔지 모름) 잔뜩 생산해 내야지.

근데 지금은 만들고 싶은 것도 없고 배가 고프지만 먹고 싶은 것도 없다.

날은 더운데 좀비처럼 돌아다녀도 혼자 먹을 만한 가게가 잘 보이진 않는다.


순간 짜증이 확 나서 강남에서 유명해진 프랜차이즈 순댓국집에 막무가내로 들어갔다.

서울은 초미니 순댓국이 11,000원인 개같은 도시다.

혼자 왔다고 자리도 완전 쪼꼬미 인간들이나 앉을 수 있는 1인석을 줬다.

순대는 조그맣고 뚝배기는 그보다 조금 더 큰데 또 먹다 보니 맛있어서 배덕감에 소주도 한 병 깠다.

평소 냄새나서 냉장고에 잘 안 두는 김치도 복수하듯 푹푹 먹고 왔다.


글 쓰고 책 읽으려고 뷰가 괜찮은 근처 카페에 갔다.

네이버로 '작업하기 좋은 곳'을 찾아서 갔는데 사람도 별로 없길래 바로 아무 데나 앉았다.

근데 하필 내 자리가 인스타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 (그 뭐 밖에 나뭇잎 보이는 뭐 그런 거 말이다)

깨벗은 여자들이 3분에 한 번씩은 내 뒤로 와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그마저도 한 20분 뒤에는 카페가 가득 차버려서 에라이 퉤, 그냥 커피 원샷 때리고 도망치듯 나왔다.


일본에서 쟀을 때랑 비교해 보니까 운동도 안 했는데 4kg 빠졌다.

꽁으로 빠졌으니 풍채 유지 좀 해야겠다 싶어서 낮술을 하러 여기저기 다녔다.

그날은 양천항교 근처까지 걸어간 김에 식물원을 구경할까 했는데 하필 휴관이었다.

또 그러지, 내가 가면 다 장사 안 하지.

근처 오래된 동네 중국집에서 미지근한 맥주에 탕짜면을 먹고 궁산에 올랐다.


이름도 궁상맞은 궁산은 허접한 높이의 동네 뒷산이다.

거기서 할아버지 두 분이 말을 걸었는데 한 번은 씹었고 한 번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뜬금없는 질문에 내 목소리가 갈라진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담배 살 때 말고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는 거 같다.

말을 안 해도 돼서 산을 오른 거였는데. 젠장할.


별 일 없이 아무것도 안 하는 일상이 또, 반복된다.

이번 달은 운동할 힘도 없겠다 싶어 헬스장을 해지했다.

살아가려면 돈은 돈대로 나가는데 더 격렬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위스키나 한 병 샀다.

그러곤 누워서 아무것도 보지 않으며 술만 마신다.

그러다 보면 내가 현존하는 인간 중 가장 쓰레기구나, 다시 한번 모든 세포가 절멸하듯 느낀다.


그래서 그냥 아무 데나 가야겠다 싶어서 무작정 고속버스 티머니 앱을 깔았다.

해외는 귀찮으니까 국내 구석 쪽에 박혀야지, 설악산에 가보고 싶어 속초를 골랐다.

에어비앤비에는 마침 딱 좋은 가격으로 물멍을 맘껏 할 수 있는 숙소가 있어 결제했다.

당장 내일 출발해도 무관한 주중을 오롯이 가진 게 내 현재 유일한 장점.

머리가 멍하면서 복잡해 날짜도 제대로 안 보고 찍었더니 모레 출발이었다.


어차피 혼자 먹고 살기엔 아직도 차고 넘치는 돈이 있으니까, 프리미엄 버스를 탔다.

날씨가 좋아서 나오길 잘했다 싶으니까 여기저기서 놀러 가자고 연락이 왔다.

꼭 필요할 때 말고 내가 서울을 떠나니까 잡는구나, 괘씸해서 안 땡기는 조합의 두 개는 읽씹 했다.

한 두 달 뒤에 만날 수 있는 약속들만 좀 잡아두고 버스에서 내리 잠을 잤다.

2시간 20분 걸린다고 했는데 3시간 걸려서 속초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고 도착한 숙소는 생각보다 더 좋아서 잠시 기분이 나아졌다.

홀딱 벗고 테라스에 앉아서 청초호 구경을 하면서 줄담배를 피웠다.

다섯 시가 좀 넘어서 미리 찾아둔 동네맛집에서 김치만두랑 칼국수를 먹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저렴하고 퀄리티 좋은 음식이 들어가니까 그제야 좀 피가 돌았다.

영랑호수공원 쪽으로 산책을 갔는데 사람이 없어서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영랑호는 바다와 연결된 엄청 큰 호수다.

장사항 쪽 방향으로 빠지려 한참을 돌았는데도 반 바퀴만 간신히 구경했다.

저 멀리 보이는 설악산과 강물에 비치는 윤슬이 압도적으로 황홀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오길 잘했다, 싶으면 순식간에 덮쳐오는 우울해지는 기분을 막기 힘들다.

푸른 호수를 오래 바라보면 그렇게 된다.


장사항 쪽은 전형적인 틀딱 여행지 같아서 오히려 내 감정에 좋았다.

급작스럽게 물드는 기분이 싹 사라지니까 파란 마음도 좀 이성적으로 붉게 돌아왔다.

속초등대전망대와 영금정에서 보는 개와 늑대의 시간 경치는 꽤 멋져서 다시 감상에 빠질 뻔할 때쯤

해가 뉘엿뉘엿 져서 중앙시장에 닭강정을 사러 갔다.

22,000원이어서 그냥 갈까 했는데 뒤에 사람들이 기다려서 그냥 사버렸다.


숙소에 와서는 소맥을 퍼마시며 닭강정을 안주로 집어먹었다.

속초는 닭강정이 유명하다더니, 뒤지게 맛있네.

만석은 서울에도 있으니까 중앙닭강정을 먹었다.

다음날은 설악산에 가야 되니 절반만 마시고 버스를 찾아보는데 촌동네라 정보가 적었다.

평소라면 건너뛰었을 할명수에서 부산 본가 동네를 소개하길래 보다 잠들었다.


내가 속초에 온 이유, 설악산 가보기.

이 얘기는 재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직장인이었던 재작년 여름 이맘때, 양양의 싸구려 모텔에서 혼자 질질 짜며 드라마를 봤다.

이틀 내리 비가 왔고 하염없이 위로 걷다가 속초에 도착했던 그때 설악산 간판을 봤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설악산에 가야지, 내가 드디어 설악산에 왔다.


설악산은 한국 3대 명산 중 하나인만큼 엄청나게 크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입구에 들어서서부터 버스로 30분은 더 가야 메인 출발지가 나온다.

내가 살면서 설악산에 온 적이 있나? 있을 텐데 기억은 안 난다.

주중인데 사람이 제법 많았고 이제는 한류가 산도 지배해 버렸는지 외국인이 특히 많았다.

그리 좋지 않은 운동화를 신어서 비선재 넘어 금강굴까지만 가보려고 했다.


가는 길에 많은 등산객을 만났다.

특히 신기했던 경험은 외국인 등산객들은 다들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한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그게 쑥스러웠는데 열댓 명 정도 받고 나니 나도 먼저 하이를 건넬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비선대의 편안한 산책코스 너머 절경이 펼쳐졌고 입산이 금지되는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금강굴에 도착했다.

그 높이가 너무 아찔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래를 보지 않고 올랐다.


나는 아무런 정보 없이 금강굴에 헉헉대며 도착했다.

사실 그냥 산중턱에 있는 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양 옆으로 클라이머들이 따닥따닥 붙은 높은 절벽이었다.

내려와서 찾아보니 그 높이가 600m였다.

맞은편의 천불봉은 봉우리들이 정말 개개인의 부처처럼 보여 신묘했다.

가을에 오면 더 좋겠다, 날씨가 약간 흐렸는데도 압도되는 풍광이었다.


금강굴 안에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절이 있다.

그 앞에는 계좌이체도 받을 수 있는데 역시 힙한 건 불교가 다 한다.

돈을 내고 비는 게 진정성이 있나? 변명해 보며 딱 하나 소원을 이루어준다길래 간절히 빌었다.

이왕이면 이번주 주말까지는 이루게 해 주세요 부처님.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기준으로 10시간 정도 남았는데 이루어질 낌새는 보이지도 않는다.


일본 헵파이브 대관람차 이후로 고소공포증 비슷한 게 생겼다.

금강굴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무서울 정도로 높이 있다.

주변 정리를 하고 계신 근육질의 스님을 뒤로하고 3시간 좀 넘게 걸려 산행을 마무리지었다.

나는 아빠 때문에 산을 엄청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산이 좋아졌다는 게 퍽 웃기다.

속초는 바다와 산이 모두 태연하게 자리 잡은 멋진 도시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혼술을 할 수 있는 가게를 찾아봤다.

속초 바닷가 근방은 혼자 술 먹기에는 너무 파티 분위기라 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침 네이버에서 추천해 주는 유명 혼술집이 숙소 근처였다.

숙소에서 씻고 있는지도 몰랐던 슬리퍼를 찾았다.

그걸 신고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날씨가 갑자기 좋아졌다.


도착한 곳에는 혼술 여행객들이 가득했다.

다들 뭐가 그리 외로워 속초에 왔나, 나도 혼자 구석에서 짱 박혀 육사시미를 시켰다.

마침 목, 금만 먹을 수 있는 메뉴라길래 재수가 좋았다 싶었다.

생맥 한 잔에 동해 소주 한 병, 강원에서 먹는 전남의 육사시미.

진짜 죽여주게 맛있는데 서울에서 먹는 돈의 반값 밖에 안 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가 보이길래 홀린 듯이 따라갔더니 속초대교 사람 하나 없는 작은 해수욕장이 보였다.

마침 시간이 해가 질 때쯤이라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 때였다.

그 풍경이 말문이 막힐 정도로 슬프고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울었던 거 같다.

무슨 자동차 지나는 다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담.

혼자 드라마 한 편 찍고 숙소로 돌아가 어제 남긴 닭강정을 마저 먹었다.


요즘은 감정이 담긴 콘텐츠는 일부러 피한다.

뭐라도 뜨면 황급히 스와이프를 하고 별 의미 없는 릴스나 보는 거다.

가장 경계하던 감정의 요동을 굳이 내 스스로 무덤을 파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느꼈기 때문이다.

근데 하필 숙소에서 제공해 주는 유튜브에 멜로가 체질이 떠서 봤다.

다른 장면에서 터질 줄 알았는데 보육원 씬에서 너무 크게 맞아버렸다.


평범하게, 사연 없이 자란 남자가 사연 있는 사람들을 보며 위로를 느끼고 건넨다.

나도 남은 돈을 전부 기부하는 삶을 산다면 좀 달라질 수 있을까.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외딴 절의 스님이 되거나 민박집 사장님이 될 생각이었는데.

머리를 비우고 온 여행지에서 갑작스럽게 전재산을 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어떤 찬사나 동정을 원해서가 아닌 진심이라는 게 심장 아래 어렴풋이 느껴진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고 외옹치를 실컷 구경했다.

금요일에는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온다.

점심부터 터미널에 사람이 그득그득한데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속초의 남과 북, 서를 모두 돌았지만 이 낯선 느낌이 너무 좋으면서 싫었다.

1시 차를 탔는데 서울에 도착하니 5시가 넘었다.


아직도 내 집 같지 않은 서울에서 라멘을 먹었다.

나는 어느 곳에도 쉽사리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사람인 거 같다.

그나마 유일하게 사랑하는 한강을 한 바퀴 돈다.

금요일에는 몸도 마음도 여유로워지나, 짜증이 가득 찬 서울 사람들도 금요일엔 표정이 좋다.

또 금방 이 서울의 생리에 동기화되는 나를 보며 복잡해진다.


속초를 간 게 벌써 몇 달 전의 일인 것처럼 까마득하다.

작은 6평 집 속에 처박히면 원래 그런가, 나는 다시 무기력해진 사람이 된다.

심장에서 난 소리가 진짜인가 싶어 인터넷으로 보육시설을 검색했다.

마침 서울에 딱 하나 내가 봉사를 할 만한 곳이 있다.

매달 첫 주 금요일에 교육이 있다고 하니 다음 주에는 그곳에 가 볼 생각이다.


아마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겠지만 내가 그곳에서 느끼는 게 있으면 좋겠다.

안쓰러움과 선민의식을 배제하며 정말 간절하게 사람을 스스로 이해하고 치유받고 싶다.

이것도 그저 말 뿐인 화풀이가 되겠지만, 지금 내 목표는 6개월 뒤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남들에게 금전적 피해를 주지 않는 모든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면 나는 증발할 것이다.

풍경에 사람이 많으면 그 속에서 사라지면 된다는 생각은 그 무게만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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