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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07. 2024

Young Man

싼타페의 앞바퀴가 크게 한 번 돌았던 그날, 씨발년이라는 욕을 알게 됐다.

씨, 발, 년은 음절 하나하나가 파괴적이었으나 입 안에서 합쳐졌을 때는 뭔가 어색했다.

그 단어의 용례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 쓰는 것처럼 뒤로 갈수록 소리가 내려앉았다.

나는 그게 퍽 웃기게 들리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방파제에서 나도 함께 뛰어내리겠다고 엄마에게 말할걸.


의사의 진단이 부정당한 그날, 이걸 평생을 숨기며 살아야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저 순수히 무지했기에 띄울 수 있는 무례한 말들이 내 말문을 가라앉혔다.

슬픔은 출구가 없길래 그냥 문처럼 보이는 곳 근처를 둥둥거렸다.

그러다 손발을 덜덜 떨며 잠에 들면 조각나는 현실과 다르게 꿈은 묵묵부답이다.

마음은 깨지는 것이 아니다.


엉엉 우는 목소리를 담담하게 끊어낸 그날, 사랑은 뭘까 그냥 쩜쩜쩜.

내가 상처를 받은 것인지 준 것인지 헷갈려 엮여있는 모든 관계의 절취선을 반 씩 잘라냈다.

저 멀리 넉터에서 봤는데... 버스정류장으로 달아나는 내게 그럴 필요까지 있냐는 친구들은 여전히 날 몰라.

우리는 마침 거기서 서로의 향을 맡았었지.

뒤적거리는 밤, 페이스북을 경유해 동그랗게 만 내 숭고한 마음도 환승할 수 있구나, 처음 알았다.


우수아이아에 흩뿌려진 내 목소리를 녹음한 그날, 십수 대의 전화기 속에 파묻힌다.

엄마는 엄마여서, 아빠는 아빠여서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통념에 반기를 들고야 말겠다.

어떤 기억의 불청객이 불쑥 끼어들어 말한다.

처절하게 죽고 싶다, 생각이 들면 그건 너무나 살고 싶은 거다.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내야지.


왜 내가 용감해야 하는 거지? 파멸 직전까지 나를 휘몰아 붙였던 그날, 편집실에 앉았다.

페이드 인, 컷 앤 페이스트, 컷 앤 페이스트, 페이드 아웃.

우는 소리 하는 사람이 지겨울 때면 3층 독방에 나를 가두며 대신 울어줬다.

그때 즐거웠으면 그걸로 된 거야,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이제는 떠나야 할 때.

대충 안다는 대답은 하나도 모르고 싶다는 변명과 글자만 다르고 의미는 같다.


오 천 원이 없어서 장대비를 맞으며 집으로 간 그날, 찝찝하게 젖은 미래가 보였다.

나는 나쁜 쪽으로 한결같은 남자라 편리함에도 예외를 두니까.

무언가를 일부러 잃어버리려 집어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 고하는 방어기제.

꼭 너랑 똑같은 사람 만나서 그대로 당해.

그 방향을 잃은 살기가 내 어딘가에 잘못 맞은 게 틀림없다.


연기처럼 길게 끈 말끝에도 느낌표가 붙은 느낌이 든 그날, 불편함 속으로 귀가한다.

실컷 떠들다 자도 아무렇지 않은 내일이 어떤 시즌에는 분명 있었는데.

부정하고, 부정을 부정하고, 그 부정을 또 부정하는 굴레 안에서 보지도 않을 하늘 사진만 찍는다.

내가 당신의 좋은 엄마, 아빠, 여자친구, 남자친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찰로 나아가지 않는 분노를 가지고 어떻게든 내일도 꾸역꾸역 집을 나서야겠다.


서른두 살에 나는 가게를 차릴 거야라고 말한 그날, 그는 귀향했다.

열일곱 살에 앉은 벤치와 스물다섯 살에 앉은 부둣가 호프집에서 우리는 음악과 성공, 슬픔을 말한다.

나보다 더 나 같은 너와 너보다 더 너 같은 내가, 꼬박 밤을 새 열 병 가까이의 잔을 맞대면.

아 술은 안정제조차 아니었구나, 이건 그냥 깊은 우물이구나.

익사하듯 생사여부만 확인하며 기억 곳곳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는... 다정한 사진들.


온천장에서 회에 소주를 마시던 그날, 나는 왜 이럴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라고 말했다.

나는 너의 키와 몸무게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그게 딱히 스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다만 네가 슬픔의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지 말았으면, 아니 오히려 다른 쪽으로 더 그랬으면.

공항시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고양이 두 마리와 술을 마신 날을 과감히 섞는다.

브리즈번, 종로, 런던, 금정 어딘가에서 내가 더 열심히 살 걸, 뻔한 후회만 첩첩산중.


밤과 오후의 애티튜드가 그리 다르지 않았던 그날, 네. 저는 여자랑 친구 못해요.

동력을 잃은 사랑에 제동장치가 무슨 쓸모가 있겠나, 급발진하듯 되짚어 읽어봤다.

입 안에 맴도는 말이 하나둘씩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항상 엔진을 켜둔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래서 눈물겹다, 유한하다는 건 당신도 알다시피 밀도 높은 헤어짐을 내포한다.

한참은 그리울 거라 생각해 각자 그리 울었나, 제철과일 같은 애정도 때가 늦으면 썩는다.


한 끼도 먹지 않은 그날, 나는 습윤한 모래를 파먹었다.

나는 숨이 꽉꽉 막히면 모래를 먹는 두더지 혹은 두더쥐가 된다.

난 그저 고요해지고 싶었어요.

이 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데 내뱉을 곳이 마땅치 않아 땅속에서 되삼켰다.

앞으로 어떤 힘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걸 들어줄 사람은 이제 없다.


내 수명과 바꿀 수 있는 돈을 헤아려 본 그날, 한강을 내려다보는 열기구를 봤다.

기억과 전혀 다른 날씨에서 맡는 어딘가 그리운 냄새 비슷한 게 하늘에서 났다.

너만 생각하고 살아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최악은 아닐 거야.

내가 평생 할 줄 몰랐던 말이 지금 고개를 옭아맨다.

나뭇잎 틈 사이로 점 점 점 커지는 그걸 보며,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어야겠다 싶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게 세 군데가 사라진 그날, 나는 이 소식을 어딘가 전하고 싶었다.

물량정리, 폐업정리, 몇십 프로 세일, 6월까지만 같은 말이 적적하게 수납된 벽 앞에 서서.

패딩 껍질 속에 숨어 내리던 눈보다 더 펑펑 울었던 게 돌아가고 싶은 먼 미래 같은데.

네가 홍어를 먹을 줄만 알았다면 갔을 텐데, 했던 가게가 실은 우리가 이미 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단 걸.

너무나 알려주고 싶은 걸 꾹 참으려 할인점보다 세 배는 비싼 아이스크림 하나를 집어 물었다.


조도를 낮춰야만 내가 살 수 있겠다 싶었던 그날, 초거대형 인센스 같은 방에서 나는 타오른다.

잃을 게 있을 때야 삶은 때때로 가치를 지니는데 나는 이제 잃을 게 없으니 뭘 가질 수 있을까.

역시 세상 사람들은 불로소득을 미워하듯 그냥 쥐어주는 말에도 얄짤이 없다.

모든 은유와 비유, 직유의 화살표가 정확히 나를 가리킨다.

점 두 개를 잇는 무한 가지 방법을 직선 하나로만 찾으려니 그렇다.


남은 돈과 시간, 기억들을 소거하던 그날, 편향된 충전과 소진을 반복하며 엄마 생각이 났다.

아무렇지 않게 딱 한 줄 보낸 말에도 그녀는 내 문장의 습도를 알아챈 게 분명하다.

내가 낳은 내 분신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언젠가 두려움을 떨치고 면허를 따게 된다면 내가 핸들을 잡고 두 번 다시는 바다를 돌아보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냥 별 거 아니라고, 오히려 좋다고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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