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Oct 19. 2024

귀환

귀한 사람과의 저녁을 위해 혜성이 되어 돌아가겠다

링이 화성에 착륙한 지 257일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를 맞아 기지의 사람들과 특식을 먹었고 그날은 모두가 임무에서 자유로웠다. 하필 그때 마침 탐지기엔 미상의 식물 신호가 감지됐고 탐사 로봇과 함께 링이 기지를 떠난 지 반나절, 큰 굉음과 함께 푸른 행성을 등진 기지가 붕괴됐다. 봉긋한 크레이터 하나가 폭발력에 비해 시시하게 남았고 링은 그렇게 혼자가 됐다.


절규할 시간도 묵도할 시간도 비정하게 수축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사흘 후면 다 함께 이곳을 떠났을 텐데. 증발해 버린 그들처럼 링도 목숨보다 집이 그리웠다.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어 졌는데 우주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 그 일반적인 사실조차 우주비행사가 되기 전까진 몰랐다. 가느다란 걸 태운다는 생각으로만, 임종의 한 순간처럼 엉거주춤 서 안쪽 주머니를 쓸어내린다. 링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소원한 이유가 있다.


외부와의 교신은 끊겼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탈출선 하나가 멀쩡하다. 문제는 링은 그걸 움직일 줄 모른다는 것. 자동 운항 모드로 전환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다. 계기판 중 만지면 안 될 것 같이 생긴 버튼만 골라 누른다. 엔진이 가동되고 경로를 찾는다. 아폴로 24는 아무렇게나 탈출과 진입을 감행한다. 저어기- 파란 지구의 대기가 보이는데, 읽을 줄 모르는 신호 아래 배터리로 추정되는 칸이 희박하다. 떨어진다.




링, 눈감아 봐.


귀찮아. 생일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유난 떨어야 하는 건지. 그냥 조막만 한 케이크에 약식으로 꽂은 촛불을 대충 후! 불고 끝내면 되는 거지. 뭐 그렇게 특별한 날이라고 너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니. 안 그래도 연말이라 바깥은 사람들로 미어터지는데. 그냥 집에서 조용히 넷플릭스나 보며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 안 될까? 난 그게 더 좋은데. 온 세상이 꽝꽝 얼어버린 12월 28일. 오늘은 어쨌든 '내' 생일이잖아.


진짜 유치해. 대충 뭘 준비해 왔는지 말 안 해도 설핏 알 것 같은데. 링은 짜증스럽게 눈을 꽉 감는다. 젤은 무얼 그리 분주하게 준비하는지 부스럭부스럭, 참 요란하다. 그 소리를 노이즈캔슬링하며 잠시간 선물이 뭘까, 얄팍한 추리를 시작한다. 슬쩍 실눈을 뜨면 내 취향이 아닌 향수, 옷가지, 몇 송이의 꽃, 직접 만든 액세서리, 손 편지 중 몇 개가 흐릿하게 보이겠지? 그냥 현금으로 주지. 나 어차피 그런 거 쓰지도 않는데.


그중 링이 가장 꺼리는 선물은 편지다. 편지는 쓰는 것도, 받는 것도 애처롭다. 그의 서랍 한편에 놓인 연보라색 상자에는 흐릿한 출처의 길 잃은 운석이 제법 쌓여있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받았대? 가끔 생각나 들춰 읽으면 저릿하다. 그래서 다시 뚜껑을 덮을 때면 잔혹하지만 이 종이뭉치를 언젠가 모조리 불살라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굳은 다짐을 맹세하기라도 하듯 꺼내문 얇은 담배에 기다란 불을 붙이며 말이다.


링이 어렸을 때, 새해만 되면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억지로 깨워 해돋이를 보러 나갔다. 한 해의 시작을 눈으로 봐야 그해 전체가 운수대통하다는 근거 없는 낭설을 믿은 당신 덕에 링은 새해 첫날부터 불행했다. 그는 당신의 독단적인 성격까지는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으나 소원의 강요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떡국을 먹는 앉은뱅이 밥상에서 당신은 각자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알아내는 폭로전을 거쳤다.


링이 성인이 되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해돋이를 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이른 외출을 제안하지 않았고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묻거나 속단하지 않았다. 1월 1일, 그들은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 빼면 다른 평범한 날들과 다르지 않은 지난한 하루를 보냈으며 비슷한 이유로 새해와 맞닿아있는 링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새 잔소리하지 않는 노인이 되었고 그 또한 그런 심심한 관계를 내심 반겼다.


그렇게 링은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우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늙은 아버지는 뜬금없는 순간금연을 권유했다. 나도 그랬지만 담배는 결국 백해무익이었다고. 아들, 무엇보다 엄마가 싫어해. 어이가 없다. 아빠나 엄마한테 잘해요. 나는 내 여자친구한테 잘할게요. 원래 몸에 해로운 게 입에 더 맞잖아요. 그런 건 끊는 게 아니라 잠시 참는 거라던데. 난 아직 못 참겠어요. 그럴 필요도 못 느껴요. 젤도 그래요.


링과 젤은 어느 봄의 늦은 밤, 68년 만에 나타난 유성우를 관측하러 간 장소에서 사랑에 빠졌다. 시작은 젤이었다. 벚꽃 구경을 했냐는 그녀의 질문에 링은 꽃보다 만개한 별들의 낙차를 헤아리며 속살거린다. 떨어지는 별에 대고 소원을 빈다는 거, 정말 이기적이지 않아? 쟤들 지금 죽어가는 중인데. 그렇게 수평선에 파문이 일었다. 12월 28일 늦은 밤, 지금 링의 눈앞에는 그때와 유사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다. 


그럼 어디 한 번 소원을 빌어볼까.

지금 내 소원은 저기 떨어지는 별처럼, 지금 이 순간이 빠르게 전소하는 거야.




링, 눈 떠 봐.


머리가 잠시 어질어질하다. 눈을 너무 질끈 감았나 보다. 좁쌀 같은 빛의 파편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쓱 닦아내고 안경을 고쳐 쓰니 그제야 자그마하게 포장된 상자 하나가 보인다. 일단 내 소원이 이뤄지진 않았군. 작은 직사각형 상자 안에는 혜성이 그려진 지포라이터 하나가 덜렁 놓여있다.


어차피 담배 못 끊으니까. 기왕 필 거면 멋들어지게 피라고. 어때 마음에 들어?


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올바른 길에서 다른 이동경로를 탐색하고 있었다니. 라이터라니. 그것도 금박 장식이 달린 촌스러운 지포라이터라니. 영문모를 미소에 따라 웃는 지혜로운 그녀를 보며 무지몽매한 그는 아득히 먼 미래를 생각했다. 젤, 나는 지금 이 꿈같은 순간을 급속냉동 하고 싶어.

그러나 시간은 원래의 속성처럼 그저 순리에 따라 흘러갔다.

링은 꼬리가 보이지 않는 추락을 견디며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포라이터를 가만히, 손에 꼭 쥐었다.


손아귀 어딘가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이전 16화 밀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