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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07. 2020

흑기사

대신 삼킬 시간

나는 술을 무척 좋아한다. 주량도 세다. 한창 술을 들이붓던 시절에는 친구와 둘이서 소주 13병을 마셨으니 충분히 주당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기세가 많이 꺾여 그만큼은 무리지만 여전히 4병 정도는 너끈하다. 특별히 선호하는 주종은 없으나 유독 소맥에 강하다. 그래서 나와 대작을 겨뤘던 사람들은 웬만해선 두 발 멀쩡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따라 편차가 제법 크긴 하지만 한때 내 특기는 한 박자 빠른 타이밍의 폭탄주 제조 및 운반으로 인간을 사족 보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토록 술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여자 친구와의 술자리는 선호하지 않는다. '주사' 때문이다. 주량이 강한만큼 주사를 부릴 일도, 주사도 거의 없는 나와 다르게 대부분의 여자 친구들은 술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쉽게 취했고 주사가 심했다. 적당한 취기를 즐기며 연애의 새로운 재미를 찾고 싶었던 마음에 종종 함께 술을 마시던 시절에는 밤 12시가 넘어가기도 전에 머리카락 일부를 홍합탕에 빠트리던 그녀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빴다. 젓가락을 떨어트리는 빈도가 잦아지는 만큼 그녀들의 말실수도 잦아졌고 그때마다 쿨한 척 넘어갔지만 알게 모르게 상처를 많이 받았나 보다. 다음 날, 술기운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녀들의 변명 섞인 사과는 해소되지 않은 숙취만큼이나 해상도가 낮았다. 어느 순간의 나는 그녀들에게 '커플 금주령'을 선언했다.




술이 개입하지 않는 연인 관계는 비록 따분했으나 적어도 다칠 일은 없었다. 굳이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사람은 솔직해질 수 있었고 나는 어지럽기보단 담백한 연애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제발 딱 한 잔만 마시자며 대롱대롱 매달리는 그녀들을 단호하게 내려놓으며 고즈넉한 카페와 술이 없는 저녁 식당 탐방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술이 부르는 실수'는 내 연애사에서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물론 회식을 핑계로 늦은 새벽 어딘가에서 잔뜩 취해 본인을 데리러 오라는 전화를 십수 통씩 해대는 상황들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이 정도로 그녀들과의 술자리를 통제했던 나 또한 그녀들과의 첫 만남 혹은 애프터에는 항상 술이 함께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어쩔 수 없는 숙맥이었나 보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전까지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고 앞에 놓인 소맥을 연거푸 들이키고 나서야 간신히 영화 취향 정도를 물어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툭툭 끊기는 대화의 버퍼링 때문에 어색한 순간이 더 빈번했다. 낯선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추는 나는 잠시 '선비' 소리를 듣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얻었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그렇게 썸의 진전을 위해 마련했던 술자리는 매번 매너를 핑계로 노잼 투성이의 일보 후퇴만을 반복했다. 전쟁처럼 치러왔던 지난한 연애 경력에 비해 나는 유독 술자리에서 이성을 대하는 데 서툴렀고 그래서 많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악성민원도 팀플레이로 해결하는 한국 사회에 걸맞게 친구들이 마련한 우연을 가장한 술자리도 3인 이상의 복수 단체가 되자 나는 거짓말처럼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술판 위의 마이클 조던이었다. 적재적소에 꽂히는 애드리브는 백보드나 림을 맞출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골대에 적중했고 주변에는 데니스 로드맨과 같은 든든한 조력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나는 떠들기 바빴고 그녀들은 웃기 바빴다. 때마침 누군가 제안한 술 게임은 자리를 더욱 오버클럭 시켰고 누구의 요청 인지도 모를 흑기사라도 몇 번 행하고 나면 그 날은 유독 쉽게 취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다음 날은 쓸데없는 말만 잔뜩 늘어놓은 것에 대한 후회만 공허하게 남았다. 그런 자리에서 만난 그녀들과는 잘되든 못되든 항상 끝이 좋지 못했다.




'백기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건강에 좋지 않은 중독 증상을 겪는 사람들 혹은 지나치게 헌신적이거나 학대적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착한 사람 증후군'이다. 이들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극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려고 애쓴다. 상대방을 돌보는 방식조차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선의를 가장한 가스 라이팅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마냥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행위가 때로는 잔인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술을 곧잘 마신다는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그저 그런 허세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진짜로 술을 잘 마셨다. 한강에서 1차로 마신 소맥이 아쉽다는 듯 그녀는 본인의 회사 근처 먹태 집에서 간단하게 2차를 하자고 제안했다. 자리를 옮기는 길에 몇몇 이야기를 나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었다. 밤 12시가 넘었지만 그녀는 젓가락을 떨어트리지도 쉽사리 말실수를 하지도 않았다. 


북북 찢어놓은 먹태를 앞에 두고 호탕에게 따라주는 소주를 공손히 받는다. 평소보다 잔이 무거웠다. 이 안에는 순도 16.9%의 알코올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투명한 액체 안에는 어떤 감정이 더해져 있다. 그녀는 흑기사를 바라지도, 백기사를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다. 지금은 당신의 외로움까지도 내가 대신 삼킬 시간이다. 물론 나는 준비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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