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로움마저 내가 대신 삼킬 시간
나는 술을 무척 좋아한다. 주량도 세다. 한창 술을 들이붓던 시절에는 친구와 둘이서 소주 열세 병을 마셨으니 충분히 주당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나. 지금은 기세가 많이 꺾여 그만큼은 무리지만 여전히 네 병 정도는 너끈하다. 특별히 선호하는 주종은 없으나 한결같이 소맥에 강하다. 그래서 나와 대작을 겨뤘던 사람들은 웬만해선 두 발 멀쩡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따라 편차가 제법 크긴 하지만 한때 내 특기는 한 박자 빠른 타이밍의 폭탄주 제조 및 운반으로 인간을 사족 보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만큼 술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여자친구와의 술자리는 선호하지 않는다. 주사 때문이다. 주량이 강한 만큼 주사를 부릴 일도, 주사도 거의 없는 나와 다르게 그녀들은 쉽게 취했고 주사가 나빴다. 종종 함께 술을 마시던 시절에는 자정을 넘어가기도 전에 이미 머리카락 일부를 홍합탕에 빠트리던 그녀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지쳤다. 젓가락을 놓치는 빈도수만큼 말실수도 흔해졌고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상처를 많이 받았나 보다. 다음 날, 술김에 기억나지 않는단 변명뿐인 사과는 해소되지 않은 숙취만큼 짠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커플 금주령을 선언했다.
술이 개입하지 않는 연인 관계는 비록 따분했으나 적어도 다칠 일은 없었다. 굳이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사람은 솔직해질 수 있었고 나는 어지럽기보단 담백한 연애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제발 딱 한 잔만 마시자며 대롱대롱 매달리는 그녀들을 단호히 내려놓으며 고즈넉한 카페와 술이 없는 저녁 식당 탐방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술이 부르는 실수는 내 연애사에서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물론 회식을 핑계로 늦은 새벽 어딘가에서 잔뜩 취해 본인을 데리러 오라는 전화를 몇 통씩 해대는 상황들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이 정도로 그녀들과의 술자리를 통제했던 나 또한 첫 만남과 애프터에는 항상 술이 연루되어 있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어쩔 수 없는 숙맥이었나 보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고 앞에 놓인 소맥을 연거푸 들이키고 나서야 간신히 영화 취향 정도를 물어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툭툭 끊기는 대화의 버퍼링 때문에 못 견디게 어색한 순간이 더 잦았다. 낯선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추는 나는 잠시 선비 소리를 듣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획득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수취인불명.
그렇게 썸의 진전을 위해 마련했던 술자리는 매번 매너를 핑계로 노잼 투성이의 일보 후퇴만을 반복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악성민원도 팀플레이로 해결하는 한국 사회에 걸맞게 친구들이 마련한 우연을 가장한 술자리도 3인 이상의 복수 단체가 되자 나는 거짓말처럼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술판 위의 마이클 조던이었다. 적재적소에 꽂히는 애드리브는 백보드나 림을 맞출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골망을 갈랐고 주변에는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과 같은 든든한 조력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나는 떠들기 바빴고 그녀들은 웃기 바빴다. 입은 가볍고 귀는 빈틈없이 닫혀있었다. 때마침 누군가 제안한 술 게임은 자리를 더욱 오버클럭 시켰고 누구의 요청인지도 모를 흑기사라도 몇 번 행하고 나면 그날은 영락없이 필름이 끊겼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다음 날은 불순한 말만 잔뜩 늘어놓은 것에 대한 후회가 공허하게 남았다. 토사물이 덕지덕지 묻은 지난밤의 거짓말을 게워내고 물 내림 버튼을 누르면 리셋이 되는 양, 파울 라인을 다시 깔끔하게 그었다. 그런 자리에서 만난 그녀들과는 잘되든 못되든 항상 끝이 좋지 못했으니까.
'백기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건강에 좋지 않은 중독 증상을 겪는 사람들 혹은 지나치게 헌신적이거나 학대적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착한 사람 증후군이다. 이들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극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려고 애쓴다. 상대방을 돌보는 방식조차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선의를 가장한 가스라이팅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행위가 때로는 잔인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무뢰배가 된 사람이 겹친다.
술을 곧잘 마신다는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하얀 셔링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은 사람이길래 그냥 하는 허세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진짜로 술을 잘 마셨다. 한강에서 1차로 마신 소맥이 아쉽다는 듯 그녀는 본인의 회사 근처에서 간단하게 2차를 하자고 제안했다. 자리를 옮기는 길이 좀 어지러워 그녀의 타비 슈즈 뒤축을 살짝 밟아버렸지만 유년기의 추억도 몇 토막 나눠 가졌다. 몸도 마음도 성숙한 사람이었다. 자정을 훌쩍 넘겼지만 그녀는 젓가락을 떨어트리지도 쉽사리 말실수를 하지도 않았다.
북북 찢어놓은 먹태를 앞에 두고 호탕에게 따라주는 소주를 공손히 받는다. 평소보다 잔이 무겁다. 이 안에는 막연한 16.9%의 알코올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투명한 액체 안에는 어떤 감정이 더해져 있다. 그녀는 흑기사를 바라지도, 백기사를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다. 아주 불길한 예감과 덜 불길한 직감으로 나뉜 동전의 양면을 코인토스한다. 어느 면이 나와도 상관없다. 지금은 당신의 외로움까지도 내가 대신 삼킬 시간이다. 물론 나는 준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