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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16. 2020

그저 바라만 보는 사람들

관조와 관종 사이

'쿨'의 시대는 저물고 '관조'의 시대가 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쿨은 어쩔 수 없이, 또 자연스럽게 관조에게 그 권력을 승계했다.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마녀사냥>이란 예능 프로그램에는 '쿨몽둥이'이란 유행어가 있었다. 연인 간의 만남이나 이별에 있어 본인만 멋지고 털털한 척하는 사람들을 혼쭐 내는 방망이를 뜻하는 데 비단 연애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국한해 쓰는 단어는 아니다. 주로 본심을 이야기하지 않고 가식적으로 에둘러 말하는 사람들에게 통쾌한 일침을 가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유교사상에 어느 정도 그 근간을 두지 않았나 싶다.


JTBC, <마녀사냥>


'자기 PR의 시대'라는 말이 구닥다리 유물처럼 느껴지는 2020년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겸손'해야 한다. '자기 자랑, 스웨그(SWAG), 플렉스(FLEX)'란 근거가 있든 없든 질타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다. 언제는 우리 스스로를 표현하고 표출하라더니. 어느 순간의 우리는 얌전히 입 닫고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당한다. 이 괴리감 때문에 사람들은(주로 젊은 사람들이) 쿨해지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본인을 자랑하면서도 겸손의 미덕마저 갖출 수 있는 방법은 '쿨한 태도'를 유지하는 방법뿐이었기 때문이다.


자기표현 수단의 최고봉인 소셜 미디어가 대표적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본인의 일상을 업로드하면서도 이미지 속 어딘가에는 꼭 하나 이상의 쿨함을 첨가했다. 날씨가 좋다는 코멘트와 함께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을 메인 오브제로 찍은 사진을 포스팅하지만 프레임의 외곽 언저리에는 명품 백이나 외제차 키를 슬쩍 끼워 넣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또한 한참 유행이 지난 '쿨'함이다. 이제 팔로워들은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쿨은 힘을 잃고 '관조'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FashionN, <팔로우미 8>


티 나지 않게 '쿨'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저 바라만 보기'를 선택했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게시물을 눈팅할 뿐, '좋아요'나 '댓글'과 같은 흔적은 일체 남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특히 지인들 사이에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관조는 익명의 누군가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나와 연관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하나씩 차단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누군가의 눈 밖에 나선 안 되니까, 누군가에게 내 삶을 모독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선 안 되니까, 사람들은 본인을 감추기 바빴다. 대신 그들은 '가계정'이라는 관조의 매개체들을 만들어냈다. '멀티 페르소나'란 말로 이를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이 또한 그저 바라만 보기 위해 시작됐다.




'그저 바라만 보기'는 사회문화적 현상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불과 몇 년 전, 한반도에는 페미니즘이 한바탕 광풍을 일으켰고 그릇된 성관념과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젠더 감수성을 장착하기 시작했고 변해야 할 것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이념은 애석하게도 '관조'라는 부작용을 만들기도 했다.


'미투'를 예방하기 위해 떠오른 '펜스룰'이 대표적이다. 2002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아내 외의 여자와는 절대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발언에서 유래한 용어다. 남성들(나이가 많든 적든)은 본능적으로, 일방적으로 페미니즘에 반발심을 가졌고 본인들만의 생존전략으로써 '펜스룰'이란 관조를 택했다. 물리적 관조의 일종이었던 몇몇 행위들이 '시선 강간'이란 이름으로 탈바꿈되면서 불특정 다수의 남성들이 일순간 성범죄자 취급을 당했던 시기를 우리는 기억한다. 이후 많은 남성들이 구태여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물리적인 눈을 감았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참으로 기묘하다. 이제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를 등지로 남성들은 '이기심'을 가장한 방패로써 관조를 내밀고 있다. "여성은 가족과 애인을 제외하면 도와줘서는 안 된다"라는 말과 함께.


SBS


비슷한 측면에서 또 다른 변질된 관조도 물론 존재한다. 바로 '도촬'이다. 이는 앞서 말한 '물리적으로 감긴 눈'과는 다르게 '뷰파인더'란 기계적 눈을 사용한 엄연한 범죄 행위다. 그러나 이 도촬 또한 현시대에는 조금 더 고찰해볼 만한 몇몇 요소들이 분명 존재한다. '초상권'과 '공연성'이 대표적이다.


우선 '초상권'의 측면에서 어디까지가 도촬이고 어디까지가 관조인지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도촬은 촬영 기기를 통해 타인의 동의 없이, 타인의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를 촬영하거나 그 촬영물을 제삼자에게 판매나 제공을 할 때 성립된다. 죄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촬영자의 촬영 의도와 촬영 경위, 촬영 장소와 각도, 촬영거리, 특정 신체부위 부각 여부, 옷차림, 노출 등이 기준이 된다. 하나 같이 모호한 판단 기준이다. 관조한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원치 않는 피사체가 끼어들었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우리의 관조는 누군가의 초상권을 침해했으니 불법적인 행위가 되는 것일까?


국민일보
EBS, <사진의 세계>


그래서 '공연성'의 측면에 대한 논의도 분명하게 필요하다. 공연성은 문제 제기가 일어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원치 않는 피사체'를 예로 들어보자. 내 친구 하나는 인스타그램에 본인이 관람한 미술관 내부의 사진 몇 장을 게시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사진이었다. 사진 구석에 자그마하게 등장한 한 여성 피사체를 빼면 말이다. 그녀는 어떻게 알고 DM을 보내와 친구에게 사진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친구의 사진에 등장한 그녀의 뒷모습은 초상권 침해이며 그 침해된 초상권이 공연성 있는 플랫폼을 통해 유포됐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내 친구에게 고소장을 접수했다면 친구는 불법적인 행위로 처벌을 받아야 할까?




이렇듯 '관조'란 사회 연결망에 개입하게 되면 지나치게 피곤해진다. 티 나지 않게 쿨해지고자 관조를 택했으나 그러한 관조 또한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잣대를 통해 평가당하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만 보기'에만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초연결 사회에 아이러니하게도 소셜 미디어 계정을 삭제하거나 '디지털 디톡스'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어쩌면 이 '관조' 자체에 이미 신물을 느껴서가 아닐까.


자의든 타의든 현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관조 혹은 관종' 사이에서 유영하게 됐다. 애석하게도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전혀 객관적이지 못하다.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이다. 우리는 어딘가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관종이라는 별칭을 붙여 비난하면서도 본인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착각한다. 본인의 관조는 관종과는 별개라고 자위한다. 사실 그 둘은 자음 한 끗 차이의 단어인 것처럼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데도 말이다.


그렇게 '관조인간'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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