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지나간 자리에는

by 채율립

최근에 에어컨을 새로 들였다. 작년 불볕더위에 온 가족이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올해는 더 쾌적하게 여름을 나기로 했다. 에어컨이 오기 전주부터 엄마는 베란다 청소를 시작했고, 거실에서 각자의 방으로 청소는 점점 확장됐다.

생각해보니 이 집에서 산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그 세월이 묻어있는 듯 잡동사니가 정말 많았다. 옷장과 서랍장, 책상을 정리하다가 19살 때부터 썼던 꽤 많은 양의 다이어리를 찾았다. 이걸 버릴지 고민했을 때마다 매번 다시 서랍에 넣어두곤 했지만, 이번엔 모두 버리기로 했다.

지난 10년간 다이어리들을 펼쳐본 횟수가 5번이 채 안 됐던 거다. 다이어리를 버리며 섭섭한 마음보다는 홀가분함이 더 컸다. 그건 그동안의 케케묵은 감정을 다 털어버렸기 때문일지도, 10년 동안의 저와는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김영하 작가는 아무 이벤트도 없는 날에 호텔에서 묵는 걸 좋아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묻어 있기 때문이라고. 그럼 우리 집엔 얼마나 많은 상처가 묻어있을까. 알게 모르게 생긴 상처가 저희가 내다 버린 수많은 쓰레기와 함께 사라졌기를 바란다. 크든 작은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프지만, 딱지가 생기고 차차 낫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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