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꿈 꾸는 디자이너 VS 경제적 자유가 있는 꿈 없는 삶
해외취업을 꿈꾸는 디자이너들 혹은 해외 디자인은 국내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글이 조금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보디빌더로 유명한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왜 플랜 B를 세우죠? 나는 오직 플랜 A만 있습니다. 될 때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될 때까지 노력하시겠어요? 아니면 이게 아니면 안 되니까 다른 길로 가야 할까요?
나의 첫 호주 직장은 싱가포르계 부부 보스였는데 여태까지 아주 볼드한 디자인을 한 데다가 한국 남자 CEO가 모든 결정을 하는 시스템의 회사여서 유연하고 섬세한 디자인을 할 기회가 없었는데 모든 디자인 결정은 여자 보스가 결정을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장식적인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포토그래피를 많이 다룰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이 회사생활에선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보수가 너무너무 적어서 한 달을 겨우 살아갔다. 말은 Senior designer 였지만(한국으로 따지만 대리-과장급 디자이너) 정말 일말의 저금도 할 수 없이 하루살이 같은 삶이었다. 두 번째는 그리고 거리가 멀었다. 차를 타고 가면 물리적으로 많이 먼 것은 아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사무실까지 들어가는데 까지 한 시간 반. 도보로 25분 이상을 걸어가야 했는데 한여름에는 내 노트북 가방이 푹푹 젖을 때까지 걸었다. 워낙 오래된 노트북이라 너무 무거웠고 어깨 통증이 너무 힘들었다.(이 계기로 나는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회사생활 2년 차가 되었을 때 갑자기 불치병이 생겼다. 너무 아파서 치료차 한국에 방문도 했었고 한국에서 돌아와서도 내 병은 점점 심각해졌다. 원인도 없었고 치료방법도 없었다. 너무 고생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겨우살이 때문에 불만이 쌓이고 쌓일 때쯤(디자인으로 먹고 산다는 걸 감사한다는 걸 잊었다), 회사가 잘 되어서 사무실을 이전해서 집 근처로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갑자기 브랜딩 에이전씨를 서브 회사로 차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보수가 오른 건 아니었다. 시간당 1불을 겨우 올려주었다. 나는 더 이상 노트북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됐지만 그래도 보수에 대한 불만은 해결되지 않았다. 나 말고도 이런 문제로 회사 직원들이 불만이 많았고 비자 문제로 풀타임(주 5일제)을 일할 수 없는 위치의 우리를 유린한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회사를 다니는 틈틈이 면접과 이력서를 넣었다. 희한하게도 아무도(?) 나를 써주지 않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왜 나를 써주지 않았는지 알 것만 같다) 회사는 거희 3년 가까이 다녔는데 그럴 즈음에 갑자기 보스가 우리에게 아무 언지도 없이 회사를 없애고 싱가포르로 사라졌다. 그래도 정이 있는데 한 달 전쯤에 언지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2주일의 노틱스를 주고 도망치듯 회사를 남에 손에 정리하다니...
내가 가진 병에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니 공황발작이 일어났다. 참으로 인생이란 알 수가 없음이야.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정말 돈을 모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당장 빨리 회사를 구해야 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한국에서 프랜차이즈 회사를 다녔었는데 운명(?)처럼 한국계 호주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디자이너를 파트타임으로 구하고 있었다.
참으로 운이 좋게 어찌 회사에 바로 취직되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였고 좋아하던 분야였는데 그때의 나는 "이왕 잘하 거면 그냥 잘하는 거 말고 멜버른에서 젤 잘하는 걸로, 다른 회사가 밴치 마킹할 정도로, 소문날정도로 잘하고 싶다"가 목적이어서 하루하루 때우고 가는 날이 없이 진짜 열심히 했다. 사진 촬영하는 날은 녹초가 돼서 초저녁부터 잠드는 날도 있었다. 작은 팀이었지만 수례 바퀴가 굴러가든 자기의 역할을 정말 잘하고 있는 팀이었지만 또 몇 가지 불만이 있었다.
파트타임(주 3일, 최대 주 4일)을 일하다 보니 생계에 문제가 있었고, 아시안 계열 회사라 호주 회사 같지 않게 보수적이었다. 물론 한국 회사처럼 회식문화도 없고 어느 정도의 복장 자유도 있었지만 호주 회사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움이 조금 아쉬웠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이 회사엔 지금까지 나의 영혼의 단짝 같은 한국인 친구를 거기서 만났는데 맥주를 좋아하고, 같은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라 회사 다니기 그래도 재밌었다.
이쯤 되니 나한테는 여러 가지 질문이 생겼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 맞나?
좋아하는 일을 쫓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현타가 오는데 이게 맞는 것일까?
내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디자인을 하는 것보다 경제적인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4년 동안 모아둔 돈이 당장 10만 원도 없고 심지어 생필품을 살 때도 생각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는 하루살이 같은 이 현실이 행복한 삶일까?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내입에 풀칠하고 살고 싶은데 왜 그 정도도 그게 안될까?
나는 왜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을까?
이게 내가 원하는 꿈이 맞을까?
이런 질문들은 지금 경제적 상황과 나의 병과 맞물려 공황발작을 더 악화시켰다.
하루에도 숨 쉴 수 없는 날들이 많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감정적으로 밀려왔다.
이때쯤부터 나는 명상 갓 시작한 햇병아리였는데 하루에 10분씩 하던 명상을 30분으로 늘리고 나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좋아 나에게 3개월의 시간을 줄게. 너는 실패한 게 아니야. 그 실패라는 단어가 너를 아프게 하는 거지. 아무도 너한테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 이렇게 모든 걸 접고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너를 따뜻하게 맞이할 가족이 있잖아. 너는 지금 아프기도 해. 호주에 계속 남아서 네가 좋아하는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도전할 건지 아니면 지금이 호주 생활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 접고 갈 건지 한번 생각해봐'
이 질문을 스스로한테 던지고 말 그대로 모든 걸 내려놓았다.
앞전에 내가 간절히 디자인일을 원했었을 때 한국에서 오랜 직장상사가 가게를 열기 위해 무료로 도와줬던 레스토랑이 거대 프랜차이가 되어 이제는 글로벌 브랜드가 되었고 브랜드 확장을 위해 나에게 프리랜서 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감사하고 신기하게도 그때 이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분은 그 회사에 이사님이 되셨고 지금도 고맙고 감사하게도 같이 일하고 있다. 그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전시회도 가고 혼자 오랜 시간을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1초도 안돼서 나는 이런 답변만 했다.
'나는 디자인을 해야 해 그것도 여기서 진짜 디자인을 하고 싶어.'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를 분명히 알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을 해야겠어'
왜 1초도 안 걸리고 나는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일까. 네가 겪은 일 좀 생각해봐. 나는 너무 지쳤어....
물론 지금처럼 운이 좋게 한국에서 일을 프리랜서로 받으며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호주에서 디자인의 가치를 가지고 그리고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환경 속에서 가슴 떨리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3년 가깝게 다녔던 그 회사에서 그 감정을 느끼니, 한국일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타협해야 하는 지점과 한계가 있음을 한국일을 하면서 더 느끼고 있었다. 이사님은 매번 '한국으로 돌아오세요 우리랑 같이 일합시다'라고 제안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끝끝내 거절했다.
가난한 꿈 꾸는 디자이너 VS 경제적 여유가 있는 꿈 없는 삶인지에 대한 질문이었으니까.
나는 왜 이 대답에 1초도 안 걸리고 대답을 하는 것일까.
참으로 모든 일은 일어날 일에 일어난 것이었던 거 같다.
이 와중에 틈틈이 다른 회사도 지원하고 면접도 보러 다니는 3중 생활을 했는데 (주 3일 프랜차이즈에서 일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면접을 보러 다녔다.)
내가 어려서부터 디자인 매거진에서만 보는 디자이너들이 꿈꾸는 글로벌 기업에 서류가 통과되었고,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을 보러 가는 것도 사실 큰 영광이었다. '아.. 책에서만 보던 그 아름다운 회사.. 제품도 너무 아름답고 패키지도 예술 가깝구나' 이 회사는 세계적인 글로벌 회사 유니레버에 속한 Tea회사였는데 전 세계 100개국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고 본사가 멜버른이었다.
2차 인터뷰까지 보게 되었고 좀 신기한 경험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크리스마스 며칠 전날 덜컥
'축하합니다. 최종 합격하셨어요. 크리스마스 명절이 끝나면 출근하시면 돼요'라는 합격통보를 받았다.
오. 마이.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