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을 염가 판매합니다 05

진짜 맨땅에서 부터 시작하기.

by 하쿠나마타타

해외취업을 꿈꾸는 디자이너들 혹은 해외 디자인은 국내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글이 조금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5 전달하고자 하면 다 뜻은 통한다.


나의 첫 번째 호주 생활의 커리어는 한국 회사였다.

물론 영어가 안돼서 한국 회사를 통해 어떻게든 디자인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나는 행복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갈 자신도 있었고 아직 젊다(?)고 생각한 이 몸을 담보로 최선을 다할 마음이었다. 뭐든 괜찮았다. 프리랜서로 아주 작은 일도 상관없었고 프린트 회사에서 종이를 잘라도 되는 소일거리라도 상관없으니 뭐라도 시작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국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무슨 일이든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던 내 자존심이 점점 바닥을 향해 기어갔다. 무엇보다 매일 예쁜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며 출근하던 내 모습이 앞치마를 매고 불판을 갈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한때는 이럴 때가 있었지'하며 신세한탄을 할 때도 있었으니까.

andre-mouton-GBEHjsPQbEQ-unsplash.jpg 아.. 불쌍한 나 자신..

그러던 와중에 내 한국 포트폴리오를 보고(물론 전에 다니던 전 회사들 이름값을 때문에) 일하기 시작했는데 공사업체였다. 공사를 하다 보면 디자인의 협조가 필요한데 한국인을 상대로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공사는 회사라 디자인 파트가 약간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 회사 사장은 40살의 젊은 CEO로 입버릇처럼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말을 클라이언트 미팅 때마다 했었고 행동은 정반대로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라는 뉘앙스를 계속 주었다. 나를 끊임없이 시험을 하였고, 내 디자인을 쓰지도 않으면서 계속 여러 가지 주문을 하였다.

무엇보다 매우 무례한 한국인 클라이언트들이 많았는데, 이 자유로운 호주에서 살면서 꼰대 중의 꼰대 마인드들뿐이었다.

'내가 예전에 대기업 임원이었는데 여기서 레스토랑 하나 하면서 살려고 왔지..' 라며 내가 어디 임원 출신이었는 데로 시작하며 자랑하는 꼰대 마인드는 그들이 여기서 먹히지 않는 브랜드 출신이니 내가 하는 말을 따르라는 어투였는데 레스토랑에 가면 정말 한국에서도 쓰지 않을 촌스러운 디자인에 디자이너가 제안하는 것은 일절 듣지도 않았다. 또 다른 레스토랑 오너는 40살이었는데 첫 미팅부터 돈 쓸 시간이 없다며 내 앞에서 돈 자랑을 마구 하기 시작했다.

차를 뭐를 타고 다니고 어제 드디어 가게가 쉬어서 사백만 원어치 쇼핑을 했다며... 왜 그 미팅에 참석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워낙 친분관계가 중요하니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특히 이 분은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해서 종업원들이 그만두기로 유명했는데 나한테도 내가 이런 이러한 이유로 이런 디자인이 어떨까요 제안을 하면 '장사 좀 해봤어? 음식 좀 팔아봤냐고? 네가 몰알아?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하면서 막말을 해되는 바람에 이런 말을 들으면서 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때 다짐한 것은 호주에서 만난 한국인과는 다시는 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matthew-henry-2Ts5HnA67k8-unsplash.jpg 스트레스의 날들이여....

이때부터 나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가난한 웨이트리스로 돌아와야 했지만 영혼을 저런 곳에서 일하면서 팔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경험이 없는 일이라도 마음을 담아 웨이트리스 일을 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다 보니 나의 갈증은 더 심해져 갔다. 호주에 오고 나서 1년 동안 얻은 기회는 그게 다였는데(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했다) 마침 한국에서 같이 일하던 다른 부서 부장님이 음식점을 하나 열려고 하는데 로고를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뭐라도 좋으니 디자인만 하면 너무도 행복했다. 그림판으로 엉성하게 만든 로고가 어떻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펍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며 로고를 만들어주면서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분은 두 자녀도 있었고 회사를 나갈 때도 너무 부당한 방법으로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드신 거 같아서 나한테 줄 디자인료로 가게 열 때 보태 쓰라고 받지 않았다. 그때 같이 일할 때도 내 모든 커리어를 합해서 가장 힘든 순간이라서 전우애 같은 마음도 있었다. (이 가게는 훗날 엄청난 글로벌 외식기업이 되었다. 이때 더 디자인 좀 잘할걸.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회사를 못 구하는 날들이 계속되고 호주에 온 이유가 점점 퇴색될때즘 나는 날짜를 정해두고 그날까지 회사를 못 구하면 그만두고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끝내고 스튜던트 비자로 갈아 탄 후였다.


면접 기회조차도 잘 오지 않게 되자 나는 포트폴리오를 고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 전문 고용 사이트를 보며 그런 스타일로 포트폴리오를 고쳤다. 영어도 한몫했다. 초창기 2년 동안은 잘 알아듣지도 못했다. 어찌어찌 말하고 알아들었는데 아무래도 영어가 는 것이 아니라 눈치가 늘어서 인 거 같았다. 그러다 보니 나를 고용하는 곳이 아무 곳도 없었다. 전화 인터뷰 조차 패스하기 어려웠고 면접을 보면 번번이 떨어졌다. 마음속으로 약속한 그 날짜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마음을 비웠다. 그런데 기적처럼 작은 스타트업 주스회사에서 나를 고용하겠다고 면접 최종 통보를 했다. 호주 디자이너로서 첫 번째 커리어가 시작이 되었다. 주 3일로 일하는 파트타임 회사였다. 처음 취업됐던 날 너무 기뻐서 남자 친구와 축하 샴페인 와인을 마시던 기억이 난다. 이제 일하던 웨이트리스 일을 생계를 위해 안 해도 된다는 사실도 기뻤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번다는 사실 자체가 이렇게 기쁠 줄이야... 이렇게 말도 잘 못하고 잘 못 듣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 내 디자인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이메일도 하나 제대로 형식을 갖춰서 쓸 줄 모르지만 정말 모든 걸 다 쏟아부어서 최선을 다해 내 의사를 전달했다. 물론 호주인처럼 프로페셔널 했으면 너무 좋았겠지만,

Me.jpeg 회사 바로 앞에 Colonial brewing (맥주공장)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맥주는 내 베스트 프렌드였다. 점심 먹고 금요일마다 낮술 먹으러 갔었다. 그나저나 난 진로 티셔트를 입고있는데?


나는 이 회사에서 내 디자인을 고치는데만 1년이 걸렸다. 한국의 상업적인 모델 위주의 디자인과는 너무나 달랐고 젊은 여자 사장님께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어필해야 해야 했으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여태까지 남자 보스한테 어필하느라 강하고 굵직한 디자인만 했으니 우아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색을 마음껏 쓸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이 회사에 3년 가까이 다니게 됐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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