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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중지추 Dec 30. 2019

대회가 쏟아져요.

 수학 문항 창작대회, 진로도서 독후감쓰기 대회, 교내 역사과 주제탐구 대회, 교내 지리과 주제탐구 대회, 교내 글로벌 말하기 대회, 과학 ucc대회, 전국 고등학생 외국어 말하기 대회, 디지털 미디어 해킹 콘테스트... 

 오늘 하루 동안 애들에게 알린 대회다. 한 학기가 아니고 오늘 ‘단 하루’동안 애들한테 공지한 대회.

 물론 오늘이 좀 많긴 하다. 중간고사도 끝나고 아이들의 마음이 풀어질 5월. 지식 위주의 수업보다는 활동적인 대회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학습의욕을 고취시킬 필요가 있긴 하다. 신록이 푸르른,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에 솔직히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책보며 펜 잡고 공부하고 싶겠는가. 학교도 그것을 알기에 다양한 대회들을 개최하여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학습의욕이 생기다가 대회들에 깔려 뭉개질 지경이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렇게 대회가 쏟아지는 이유는 뭘까?


 생기부 스펙을 위해. 다른 거 없다. 요즘 모든 학교생활의 중심축은 생기부다. 그럼 생기부 스펙을 왜 쌓으려고 하는 것인가? 

 대학 가기 위해. 다른 거 없다. 여기에서 인문계 고등학교의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한국 고등학교,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의 존재목적은 대학을 가기 위함이다. 이건 뭐 지나가던 개와 고양이도 아는 사실. 입시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전투적 공부. 그런데 이렇게 지식 위주의 전투적 공부로 가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애들 인성이 개판이네? 학교 밖, 학원을 더 신뢰하네? 학교가 망가지네? 공교육이 무너지네? 

 그래서 나온 것이 수시제도. 그 중에서도 백미는 입학사정관제다.(지금은 학생부 종합전형) 하루 시험 잘 봐서 대학 가는 것이 아니라, 3년 내내 학생의 학교생활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것. 그러니까 예를 들어, ‘A’라는 학생이 서울 소재 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에 원서를 냈다. 학생의 생기부를 보니 학교생활 내내 교내문예대회, 글짓기 대회 등에서 상을 많이 탔고, 문학 관련 동아리 활동도 쭉 했고, 국어 수업시간에도 열심히 활동했다는 선생님의 증언이 있다. 게다가 종합의견을 보니 배려, 협동, 봉사심까지 갖춰진 학생이라고 담임 선생님이 증언했다. 그럼 대학에서  “오호, 이 학생은 정말 국어에 관심이 많군.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많은 활동을 했다면 대학에 진학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장차 우리 과를 빛내주겠어. 합격!”이라고 한다. 거칠게 표현했지만 ‘입사’의 큰 뼈대는 대강 이렇다.

 학교생활이야 개판으로 해도 고3때 시험 한 번만 잘 보면 대학 가던 때. 그때보단 확실히 학생들이 학교생활에 더 충실해지긴 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본질적인 의문이 생긴다. 학교의 모든 활동은 생기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 대학에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어떤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함인가? 살기 위해 먹을 때 우리는 맛집을 찾아가지 않는다. 먹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우리는 맛집을 찾아 간다. 그리고 행복을 느낀다. 

 학교의 모든 활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 자체로 행복해야 한다. 지혜를 담고 있는 모든 책들이 말하듯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 미래의 행복을 담보로 “지금 여기”에서 하는 활동은 고통일 뿐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은 점심시간이다. 그 시간은 생기부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가기 위해, 스펙 쌓기 위해 밥 먹는 사람은 없다. 그냥 밥 먹는 거다. 즐거우니까. 아무 고민 없이 친구와 장난치며 맛있는 밥을 함께 먹는 것. 그 자체가 그냥 행복이니까. 

 그럼 생기부 신경 안 쓰고 그냥 활동 자체를 즐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물론 그래도 되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자. 선생님도 생기부, 친구들도 생기부, 부모님도 생기부, 모두가 생기부 걱정을 하는데 그 속에서 ‘난 그딴 거 신경 안 써. 난 지금 이 순간을 즐기겠어.’ 라고 말할 수 있는 17살 아이가 몇이나 될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구조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간다. 생기부를 위한 구조 안에서 꿋꿋이 행복하게 살아갈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거 생기부 들어가요?”라고 오늘도 묻는 학생들.

 “야, 이거 생기부 들어가.”라고 오늘도 말하는 선생님.

 대한민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생기부를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대학에 가기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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