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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나따 Oct 10. 2021

흔한 스우파 과몰입러의 '샹년론'

세상 모범생에 어른들에게 늘 '참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는 나에게도 피 속에 흐르는 반항아 기질이 있다. K-장녀는 은은하게 돌았다는 인터넷 유머를 보고 나 스스로를 설명해주는 mbti를 만난 듯 체기가 내려가기도 했다. 대게는 평화로운 삶과 성실함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든 쉽게 간파당하고 싶지는 않은 청개구리 심보.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본다는 소리를 너무 정성스럽게도 했다. 쎈 화장에 피어싱 한 두개 쯤은 기본으로 하고 나온 언니들(언니 아님... 내가 언니임...)이 떼거지로 나오는 티비를 보고 있으니 남편이 나와서 묻는다. "너도 이런 걸 봐?"


출처 : 이데일리


나도 이런 걸 볼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엄정화와 이효리를 좋아한다. 내가 갖지 못한 이미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악마의 편집이라는 소리도 많지만, 나는 스우파 출연진들이 누구보다 배틀에 진심으로 이기려고 이를 꽉 깨무는 모습이 좋다. 그건 아마 내가 갖지 못한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경쟁을 너무너무 싫어한다. 경쟁을 싫어하는 이유는 지는 것이 싫기 때문에 경쟁 자체를 피해버린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데 스우파는 그렇게 매회 배틀을 하는데도 그게 보기 힘겹지가 않다. 부정적 자극보다는 긍정적 자극을 더 크게 받는 것 같다. 


최근 본 미드 <더 체어>에서 영문학과 최초의 아시안 여성 학과장이 된 주인공에게 이사가 이렇게 얘기 한다. "여자가 겸손해서는 성공할 수 없어. 너 자신을 낮추지마."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대충 이런 내용. 이 말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성별에 관계없이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 겸손하라고 배워왔던가. 그런데 유럽인 사회에서 특히 '아시안 여성'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나는, 그 좋은 가르침이 외국에서 살아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버려야하는 가치관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여성를 두고 뒤에서 '남자 상사들에게 아양을 잘 떨어서 성공했다'는 뒷담화도 들어보았고, 그 반대로 성공한 여자에게 '여자처럼 굴지 않아서 좋다'라고 칭찬하는 것도 들어보았다. 남자가 일을 못하면 '저 새끼랑 일하기 싫다'고 개인의 문제가 되지만, 여자가 일을 못하면 '이래서 여자랑은 일 하기 싫다'고 특정 집단의 문제가 된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자의 성공은 여전히 예외적이고 소수의 케이스이다.


내가 어떤 분야에서 몇 년째 공부를 하고 있어도, 나보다 그 분야에 대해 더 잘 아는 양 떠들어대는 무례한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그들 앞에서 배워온 대로 "겸손"했고, 그들은 내 겸손을 나의 실력으로 받아들였다.  스우파의 여자들은 다르다.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 존중하고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당당함을 갖고 있다.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넘쳐난다. 


특히 내가 감동 받았던 점은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댄서들에게 약자로 자주 지목되고, 무시당하기도 했던 한 멤버를 향해 그 팀 리더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는 그런 이야기 듣고 기분이 안 상했어? 왜 그냥 듣고만 있었어?" 자기가 말해봤자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는 대답에, 리더는 "듣는 내가 안 괜찮은데 너는 왜 듣고만 있어? 너가 안 괜찮으면 표현을 해야지."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강단있는 메시지였다. 나는 얼마나 수없이 많은 괜찮지 않은 순간을 애써 남들을 배려하며 그냥 넘어갔던가. 기분 나쁜 일에,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불편함을 말할 수 있는 것에 엄청난 '용기'까지 필요하게 되었는가. 


샹년이 되는 것도 쉽지 않다. 기질이 안 그런 사람에겐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느니, 그냥 내가 참고 넘어가는게 훨씬 편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백세시대. 아직 인생은 길고, 세상은 팍팍하고, 억울한 일은 얼마든 생길 것이므로 오늘부터라도 조금씩 샹년이 되어보려고 한다.  경제적 착취에, 커리어 후려치기에, 모든 차별적인 발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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