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색깔
포르투갈에서는 아주 더운 여름의 몇일과 아주 으슬슬한 겨울의 몇주를 빼면 1년 내내 꽤 비슷한 날씨다. 지금이 10월인지, 4월인지, 6월인지 자주 헷갈려했다. 한국에서라면 일주일도 못입었을 가죽 자켓을 일년 내내 아주 애용했다. 천이 단단한 트렌치코트도 주머니 사정에 비해 꽤 고가의 것을 사서 뽕을 뽑을 때까지 입었다. 많이 춥지도, 많이 덥지도 않은 날씨 덕분에 가능한 패션이었다.
하늘은 늘 푸르고 햇발은 늘 담장에 소색이는(김영랑 시에서 따옴) 천국같은 날씨. 아, 이게 교과서에서 배우는 ‘지중해성 기후’구나, 감탄을 하며 왜 한국은 좋지도 않은 걸 “대한민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라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병아리들을 데리고 자랑스럽게 가르쳤을까? 생각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것이 내게는 ‘겨울엔 몹시 춥고 여름엔 몹시 더우며 봄과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은 네가 열심히 짬을 내어 국내 여행을 가지 않는다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느낄 수는 있다’는 의미였다. 사계절이 애매모호하다는 것, 연중온난하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었다.
이 나라는 날씨를 수출해야해. 내가 만든 말인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인지 경계가 불분명해질 정도로 입에 닳게 저 말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렇게 포르투갈 날씨 예찬론자인 내게도 한국이 몹시 그리운 시즌이 있었다. 한국에 사는 친구들의 인스타 피드가 가을의 단풍으로 물들때였다.
4월에 전국민 피드가 벚꽃으로 물드는 시즌도 있지만 그건 별로 부럽지 않았다. 한국에 살아도 사실 풍성하고 예쁜 벚꽃 구경이란 신선놀음처럼 아득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외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못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엔 포르투갈 봄꽃이 있었다. 자카란다라는 보라색 가로수인데, 가리에 큰 나무들이 연보라 꽃을 피워내는 장관은 충분히 벚꽃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그러나 단풍은 달랐다. 주왕산에 꼭 단풍구경을 가지 않아도, 집 앞에 학교에 거리에 버스 창문 밖에. 가을 단풍은 온 거리에 가득한 것이었으니. 포르투갈은 위도는 한국과 비슷하나 온난한 기후 때문인지 가을에 단풍이 드는 나무 종류는 잘 없었다. 옛말에 며느리랑은 봄꽃 구경가고 딸이랑은 가을 단풍구경간다는 말이, 원래는 무슨 의미였는지는 몰라도 타국에 있는 내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5년만에 제대로 된 가을을 만끽하고 있는 요즘. 나는 열심히 가을의 색깔들을 수집한다. 관광 온 외국인 관광객처럼 연신 셔터를 누른다. 버스을 기다리며, 주차장에서, 학교 도서관에서. 단군 할아버지가 터잡으실 때는 혹시 한반도가 빨갛게 노랗게 단풍 드는 가을이 아니었을까 공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