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 꿈은 4대 보험 되는 직장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 진학, 프리랜서로 통번역 일을 하거나, 과외 및 학원 아르바이트, 외국에 나가서는 생계형 가이드까지 하면서 일용직으로만 살았다. 머나먼 타국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가서 거기서 생활비 벌고, 학비 벌고 잘 살았다는 자신감으로 살았다. 지구 어디에 떨어뜨려놔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는 강한 생활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 비해 내 소비는 너무나 초라하고 형편없었다. 보통 좋은 소비에 대해 말할 때 "한번 살 때 좋은 걸 사서 오래 써라", "하나를 사더라도 좋은 걸 사라"라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이론으로는 알지만 실천하기 어려웠다. 당장 방값 내고 교통비 빼고 나면 남는 돈이 간당간당 한데 한 번에 목돈이 드는 큰 지출을 하기가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필요한 걸 안 살 수는 없으니 가격이 훨씬 저렴한 걸로 대체해서 샀다. "이 가격에 이 정도면 괜찮지 뭐." 하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예를 들어 좋은 소재의 겨울 패딩, 제대로 된 구두, 한번 사면 몇 년씩 써야 하는 노트북 등등. 내 소비의 모든 기준은 '퀄리티'가 아니라 '가성비'였다.
그렇게 당장은 조금 저렴한 가격에 잘 샀다 싶은 물건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트북은 3년을 낑낑대며 겨우겨우 돌아가다가 10페이지가 넘어가는 논문을 쓰면 맛탱이가 가버렸다. 애초에 워드, 파워포인트 정도만 하면 되기에 사양이 엄청 높은 노트북도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다는 이유로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제일 싼 거"를 찾았던 것이 문제였다. 워드에서 "그리하여"를 입력하면 3초 뒤에 "그리그리하여하여"라고 출력되었다.
정신이 번쩍 든 건, 작년 겨울 패딩을 살 때였다. 밥을 먹으러 갔다가 근처 쇼핑몰을 구경하면서 "패딩을 하나 사야 하는데~"라는 말에, 남자 친구가 "또 너무 싼 거만 보지 말고 한 번 살 때 괜찮은 걸 사."라고 말했다.
분명 맞는 말인데 순간 너무 서운함이 몰아쳤다. 직장인들에겐 그게 쉽겠지. 매달 따박따박 월급 나오고, 정 안되면 신용카드도 있고. 근데 나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은 오늘 돈 있다고 몇십만 원 턱 써버렸는데, 다음 달에 일이 안 들어오면? 담 달엔 굶어?
나도 모르는 게 아니고 잘 아는데 형편상 그렇게 쓰지 못하는 것일 뿐인데...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하게 들렸다. 아니 서운함이라기보다는 찔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주일 뒤, 특가로 세일하는 제품을 샀다. 디자인이며 따뜻함이며, 첫 한 달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한 달 조금 지나자 털이 빠졌다. 2010년도 일이 아니라 2019년 일이다. 아니 요즘도 털 빠지는 패딩이 있어? 경악스러웠다. 아, 이 옷의 수명은 딱 올 한 해뿐이구나. 내년에 난 또 패딩을 사려 돈을 쓰겠구나. 씁쓸했다. 남자 친구의 말이 맞았다고 인정해야 했다. 결국 그때 제대로 된 물건 하나를 사는 게 훨씬 돈과 발품을 절약하는 거였다.
명품백 하나 없이 이렇게 모든 것에 "젤 싼 거"를 찾으며 검소한 소비를 하는데도 왜 내 지갑은 줄줄 돈이 샐까...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가성비만 따지다가 30만 원 쓸 거 6만 원짜리 5번 사고, 또 항상 차선의 물건을 선택하다 보니 거기서 쌓이는 욕구불만을 다른 먹는 거나 자잘한 물건을 사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프리랜서로 사니까 어쩔 수 없어~ 하면서 합리화했지만, 사실 나의 잘못된 소비 패턴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개선해야 된다고 느꼈다. 더 오래, 더 잘 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