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일한 사치품 바디로션
1. 반복되는 샤워 루틴이 너무 지루해
바디워시와 바디로션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향으로 샤워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바디워시를 처음 내 돈 주고 사 본 건 대학시절 어학연수를 떠난 브라질에서였다. 그 전에도 자취는 해봤지만 샴푸나 바디워시를 내 돈 주고 사지는 않았다. 우리집(본가)에는 늘 명절 선물로 샴푸세트가 들어왔는데, 온 식구가 쓰고도 남을 양이라 늘 집에서 자취방으로 보내주는 샴푸와 바디워시를 썼다. 그러다가 외국으로까지 그걸 싸들고 갈 순 없으니 처음으로 외국에서 사 본 나만의 바디워시는 트로피컬 과일 향이었다. 그때 처음, 샤워가 그렇게 기다려지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고 합리적인 소비를 배워보자,라는 다짐으로 시작한 나의 소비일기지만, 하나의 예외만을 두고 여기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사치부려라 한다면 내게는 그것이 바디로션이다. 변덕이 심하고 뭐든 싫증을 잘 내는 나는 매일 머리 감고 - 샤워하고 - 세수하고, 이 똑같은 패턴이 가끔 지겨웠다. 그런데 바디워시를 내가 좋아하는 향으로 골라 쓰고 씻은 후 향을 맞춰 로션까지 바르면 그게 아침이든 저녁이든 하루가 그렇게 개운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쓰던 거 마저 쓰고 새 거 뜯어라"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도 없으니 나는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여러 향기의 바디워시를 늘어놓고 썼다. 그럴 때다 흥얼거리던 노래는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
새 샴푸를 사러 가야지
아침 하늘빛의 민트향이면 어떨까
향도 계절마다 다르게 써야 한다는 걸 지금도 조금씩 배우고 있는데, 예를 들어 같은 꽃향기라도 그 무게감이 조금씩 다르다. 초봄엔 더바디샵의 모링가 향이 포근하고, 오뉴월이 되면 록시땅의 장미향을 바른다. 건조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엔 니베아 특유의 향이 나는 인샤워 바디로션, 겨울엔 파머스의 꾸덕한 코코아버터. 물론 나는 싫증을 자주 내므로 계절마다 해마다 새로운 제품들을 트라이해본다.
2. 이런 편력에도 순정이 있다
향수에 도전해본 적도 있다. 성년의 날인가 선물 받은 향수가 있었다. 일단 향수는 내가 머리가 아팠고,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어렵게 다가왔다. 섣부르게 썼다간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때 마침 조경란의 <백화점>이라는 수필에서 '우울이 심한 사람일 수록 향수를 많이 쓴다'라는 구절을 보고 덜컥 겁이났다. 나도 나의 우울한 기분에 가려 향을 제대로 맡지 못하고 향수를 남발하면 어쩌지? 그때의 나는 립스틱을 남발해서 윗니에도 묻히고, 치마를 남발해서 꽃무늬에 미친 사람처럼 하고 다녔으니까.
이제와서 이런 말 하면 신빙성이 떨어지겠지만, 사실 나는 무향무취의 화장품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아벤느, 피지오겔, 세타필 등 피부염을 달고 살기 때문에 늘 더마제품을 쓴다. 6년 전 심한 피부 두드러기를 앓고 나서부터는 샤워할 때 비누칠은 생략해도 바디로션은 꼭 바르게 되었다. 그때는 피부과를 아무리 다녀도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치료도 못하고 밤새 잠 못 자고 벅벅 긁기 일쑤였다. (지금 스스로 진단 내리기로는 몸이 닭살이라 모공각화증 때문에 건조함이 더 심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남동생 역시 군대에서 비슷한 피부 문제로 고생했다는 걸 보니 아마 유전인가 보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자극 없는 더마 제품을 매일매일 쓰는 베이스로 두고 가끔씩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향이 좋은 제품을 쓴다.
그러나 나도 순정이 있다. 바로 도브 뷰티바이다. 저렴한 가격에 어렸을 때부터 봐 온 흔한 비누라고만 생각했지만, 한때 모 유투버를 통해 붐을 끌면서 나도 속는 셈 치고 구입해봤는데 완전 홀딱 반해버렸다. 당김도 하나도 없고 머리부터 얼굴, 발끝까지 쓸 수 있는 제품이라 여행 갈 땐 도브 뷰티바만 챙겨가기도 했다. 향도 은은하니 좋고 머리를 감아도 생각보다 처지거나 떡지지 않았다. 이렇게 나도 바디용품의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인가!!! 나같은 변덕쟁이가 과연 가능할까!
3. 명절선물세트냐 돈지랄이냐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다시 본가에서 명절 선물로 받은 샴푸와 바디용품을 쓰고 있다. 이사 선물로 삼촌까지 생활용품 세트를 주셔서 1년 동안 샴푸나 바디워시 살 일은 없어 보인다. 마트에서 도브 뷰티바를 볼 때마다, “나도 한 때는 샤워에서만큼은 미니멀리스트였는데... 지금은 집에 한가득 쌓여있는 바디워시를 두고 굳이 새로 이 도브를 사는게 맥시멀리즘이야...”라며 사고 싶은 걸 꾹 참게 된다.
그래도 아직은 꿈이 있다. '아침 하늘빛의 민트향 샴푸'를 사러 가는 꿈. 그래서 야금야금 여행용 사이즈의 바디로션이 있으면 사서 써본다. 최근에는 친구가 러쉬에서 비누를 사줬는데 너무 좋더라. 아침에 일어나서 너무 씻기 싫을 때, "아 맞다 좋은 비누 있었지?"하는 생각으로 벌떡 일어나서 씻게 된다면 너무 과장처럼 들리려나? 그런데 나 같은 호들갑쟁이에게는 향 좋은 바디워시가 정말 효과가 있다. 하루의 피로와 권태를 날려버리고 조금 기분 업 시켜주는 효과.
가끔 돈을 벌다 보면 내 기분과 자존감을 팔아 돈을 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비굴해야하나? 싶을 때도 있고, 돈을 버는 대신 더러운 기분을 갖는 등가교환인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는 다시 좋은 기분과 뿌듯한 감정을 산다. 그 소비과정이 지나치게 즉흥적이면 우리는 그걸 '돈지랄'이라 부르고, 그 돈을 버는 과정이 너무나 더러웠으면 그걸 '시발비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돈지랄과 시발비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미봉책, 임시방편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인스턴트 기쁨을 무시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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