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쇼핑 꿀팁’은 없지만 '자아 탐구'는 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시리즈는 쇼핑 꿀팁, 저렴하게 사는 방법, 갓성비 아이템 등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엉망진창 되는대로 소비를 해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바꿔나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쇼핑하면 빠질 수 없는 소재가 바로 '옷'이다.
패션 테러리스트였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환골탈태한 컨텐츠는 이미 많다. 그중 내가 재밌게 본 것은 예묘의 <나도 옷 잘 입고 싶다>이다. 천계영의 <드레스코드>라는 작품도 있지만 이건 자료조사 열심히 해서 옷 입을 때 유용한 정보 - 체형별 기본 코디 상식, 베이직 아이템 사는 법 - 등등을 소개한다면, <나도 옷 잘 입고 싶다>는 왜 작가가 옷을 대충 입게 되었고 옷이 자존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들여다보는 패션 만화를 가장한 자아 탐구 만화이다.
예묘 <나도 옷 잘 입고 싶다> 링크 :
http://webtoon.daum.net/league/view/20067
나는 그동안 옷을 살 때 비싸고 좋아 보이는 옷은 아예 입어보지도 않았다. 같은 가게에서 파는 옷도 좋아 보이는 옷은 당연히 비싸겠거니 생각하고 자세히 들여보지도 않고 세일하는 품목만 보았다. 끝까지 고민하는 두 아이템을 두고도 늘 좀 더 싼 것을 고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조금 더 싼 게 고작 5천 원 차이일 때도 많았다.
한 번은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처음으로 목돈이 생기는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여동생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겨울 외투를 사주고 남은 돈으로 내 것도 적당한 걸로 골랐다. 같이 새 옷을 입고 교회를 갔는데 적당히 남은 돈으로 타협해서 고른 내 옷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 몸에도 훨씬 큰 사이즈에 옷이 무겁기만 하고 따뜻하지도 않았다.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았다. 그런 선택들이 쌓이니 안목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돈이 없지 보는 눈이 없나
그러던 어느 날, 인생 교훈은 트윗 짤로 얻는 내게 깊이 감동으로 다가온 문구가 있었으니,
사고 싶은 이유가 가격이면 사지 말고
망설이는 이유가 가격이면 사라
라는 명언이었다. 나는 그동안 완전 반대로 살고 있었다. 사고 싶은 이유가 가격이어야 샀고, 망설이는 이유가 가격이어서 사지 않았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데 돈도 없는 주제에 진상 클라이언트 가려 받고, 쓸 때는 또 발발이 새끼마냥 싼마이만 찾아다녔다.
2. 옷이란 가려주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것
어느 날 내가 벗어놓은 옷을 보는데 내 모습이 보였다. 청바지는 O자로 휘었고, 신발은 유독 뒤꿈치가 닳아있었다. 팬티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한 방향으로 휘어있는지. 내 뒤틀린 골반, 내 팔자형 걸음걸이가 벗어놓은 옷 속에 그대로 담겨있었다. 체형이 커버가 되는 옷을 입으라고들 하지만, 옷이 체형을 보완해주는 기능은 부차적이고 어쨌거나 내 몸을, 또 나를 대표해주는 기능이 훨씬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은 나를 가려주는 게 아니라 나를 보여준다.
형편보다 무리해서 명품을 휘감고 다니자는 이야기나 남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비싼 옷을 입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인류는 늘 옷을 입고 살았으니, 누군가를 만날 때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 나의 언어와 제스처, 표정 그리고 바로 '옷'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제대로 된 옷을 한번 사보자. 결심을 했지만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았다. 대신 조금씩 변화와 노력의 흔적들을 기록해본다.
3. 퍼스널 쇼퍼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보자
나는 남유럽에 살았다. 유럽 SPA 브랜드인 자라, 마시모두띠, 망고, H&M, 오이쇼 등 많은 브랜드들을 꽤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저렴한 가격이란 것도 지금 한국에 와서 보니 저렴하게 보이는 거지, 현지에서 살 때는 버겁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가끔 기분 전환으로 시내의 4층짜리 망고 건물이나 귀족 저택을 리모델링한 마시모두띠 건물을 구경하는 것이 소소한 재미였다. 여름휴가철을 앞두고 예쁜 신상 원피스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자 광고모델로 일하는 친구가 같이 쇼핑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잘 어울릴 만한 옷들을 턱턱 집어줬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남유럽 애들의 옷의 기준은 한국의 것과 많이 다르다. 브이넥의 깊이가 다르다. 시스루의 투명도가 다르다. 친구가 골라주는 옷들은 처음에는 “저게 나랑 어울릴까?” 심히 갸우뚱하게 되는 옷들이었다. 어쨌든 골라주는 옷을 들고 피팅룸로 갔다. SPA 브랜드의 장점이 또 넓은 피팅룸과 자유로운 피팅 분위기. 친구는 타이머라도 갖고 있는 건지, 내가 옷을 다 입고 막 지퍼를 잠그면 “언니 다 입었어요?” 하고 귀신같이 물어봤다.
그렇게 친구의 추천으로 입어본 옷이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가격이 고민돼 일주일 정도를 견주다가 결국 구입했다. 돈 아깝지 않게 여름 내내 잘 입었다. 친구는 소재를 보는 눈도 좋아서 어떤 소재가 구김이 덜 가고 빨래 후에 손상이 덜 갈지도 금방금방 캐치했다. 그런 센스까지 다 배우기엔 한 세월 걸릴 것 같았지만 기꺼이 쇼핑을 도와주는 능력자 친구가 있으니 옷 사기가 훨씬 수월했다.
4. 내가 입는 옷은 어떤 나를 보여주는가
나는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자신만의 소신이 있고, 아무리 돈 버는 일이어도 정직하지 않거나 너무 큰 정신적 대미지가 있으면 no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 옷은? 옷차림은? 옷을 살 때의 나의 기준은? 가장 큰 기준을 싸냐, 비싸냐에 두고 내 취향과 안목은 제쳐두고 늘 가격이 적당히 합리적인 차선의 옷을 사 왔다. 그런 옷들이 쌓이니 쇼핑은 늘 만족스럽지 못하고 돈은 돈대로 쓰는데 옷장에 입을 옷은 늘 부족했다. 뭔가 채워지지 않으니 뜬금없이 길 가다가 꽂힌 이상한 옷을 지르며 그 공허함을 달래려 했다. 그 지른 옷마저도 가랑비에 옷 젖을 수준의 작고 소소한 금액이었고 그 소소한 금액들이 모여 무섭게 통장 잔고를 퍼 나르고 있었다.
‘나다운 옷’은 단지 스타일의 문제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연보호를 위해 패스트패션에 반대한다. 작년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그릇된 역사관과 부당한 외교 처리에 반발하여 거의 국민 교복이던 유니클로 베이직 아이템들을 불매하고 대체품을 찾았다. 매일 옷을 고르는 것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며 스스로 유니폼을 정한 외국의 한 직장인도 이슈가 됐었다. 나는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유독 옷 쇼핑에서만큼은 가성비와 차선의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내 가치관으로 나는 가성비의 사람, 돈이 기준이 되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데 왜 옷을 살 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되자. 내가 입는 옷도 나답게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