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머니는 말하셨지 "먹는 것만큼은 아끼지 마라"
김경미 시인은 이렇게 썼다.
어머니는,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구두만큼은
비싼 걸 신어야 한다 아버지는, 소고기는 몰라도 돼지
고기만큼은 최고 비싼 질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 화장하다 만 듯 사는 친구도, 생리대만은
최고급이다 먹는 입 하찮아도 칫솔에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누구는 귀를 잘라 팔지언정 음악만은 기어이 좋은 걸 산다
다들 세상의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리니
- <질> 중에서
누구나 단 하나쯤은 질을 따진다. 화장실 휴지만큼은 파격 세일한다고 해서 아무거나 사지 않고 꼭 3겹을 산다거나, 지갑에 돈은 많이 못 넣어 다녀도 지갑만큼은 좋은 걸 산다거나. 개인이 믿는 미신에 따라, 또 개인만의 기준에 따른 지조에 따라 포기하지 못하는 질이 있다.
할머니는 내게 늘 "먹는 것만큼은 아끼지 말고 돈 써라"라고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기숙사와 자취방을 전전하는 어린 손녀가 행여나 굶고 다닐까 안쓰러워하시는 말씀이었다. 내가 입이 짧긴 하지만, 먹는 거 아껴가면서 독하게 공부하고 살진 않았는데... 오히려 너무 먹는데 펑펑 써서 문제였다. 집에서 해 먹긴 귀찮으니까, 오늘은 특별히 스트레스받으니까, 그냥 tv에 나오는 게 먹고 싶어서.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욕심부려 많이 시키고 남기기도 했고, 이정로도 비싼 가격의 레스토랑에 가긴 부담스럽지만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가기도 했다. 먹고 후회한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먹는 것마저 돈 따지면서 아껴 쓴다면 너무 자신이 초라해지니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2. 삼시세끼 챙겨 먹는데 드는 비용 - 가격, 시간, 정성
그런데 먹는 것에 돈을 많이 쓴다고 좋은 것을 먹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우리가 차승원과 유해진처럼 섬에 갇혀서 하루 세끼 뭐 해먹을지만을 고민하는 것이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면 세끼 꼬박꼬박 정성 들여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은 메뉴 고민하는 것마저도 피곤하게 느껴지고 밥을 먹기나 하면 다행인 날이 수두룩하다.
나 역시 밥을 잘 챙겨 먹게 된 계기가 고립생활에 가까운 유학생활과 코로나였다. 유학을 가서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프면 안 된다, 그럼 병원비가 어마 무시하게 깨질 뿐 아니라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아프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살았다. 대단한 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철칙으로 삼은 것은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이었다. 학위는 못 받더라도 밥은 꼭 챙겨 먹으리! 매해 신년 다짐이 이거였다. 게다가 집 바로 앞 마트에서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 값싼 고기들을 살 수 있었다. 질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한 시간과 비용이 충분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아침 안 먹고사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겠거니 했다. 아침 차려 먹을 시간에 잠을 더 자는 것이 훨씬 달고 배불렀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 때문에 꼼짝없이 집에만 갇혀있게 되었다. 게다가 새로 이사한 집도 시장 바로 옆에 위치해있었다. 올해 3월, 매일 동생과 집 앞 시장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해 먹었다. 장을 자주 보니 제일 먼저 산 것이 장바구니였다. 특히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여동생은 음식을 포장할 때도 늘 집에서 용기를 가져갔다. 그러면 설거지도 훨씬 편하고 쓰레기도 덜 나왔다.
3. 시장의 장점
무심한 듯 친절한 오지랖
우리가 자주 가는 곳은 이름도 <우리 동네 야채 과일>이라는 청과물 가게와, <단골 정육점>이라는 정육점. 특히 채소가게는 매일 가서 장을 봤다. 하루는 두부와 버섯, 하루는 냉이, 하루는 계란과 무 등등. 한 번은 국물용 마른 멸치를 사고 싶은데 한꺼번에 파는 양이 너무 많았다. 우리끼리 "이거 사면 너무 많지 않아?" 했더니 무심해 보이던 주인아주머니께서 그 말을 다 듣고 계셨는지 "멸치 똥 다 따서 냉동실에 소분해서 넣어놓으면 부피 차리도 안 하고 오래 먹을 수 있어요."하고 주부 9단 꿀팁을 알려주셨다. 어느 날은 1500원짜리 두부를 고르자 무심하게 1000원짜리가 더 크고 고소하다며 냉장고에서 꺼내 주시기도 했다. 가격도 할인마트보다 훨씬 쌌다.
제철과일과 채소
시장에서 만나는 소소한 친절도 좋았만 또 다른 장점은 제철과일과 채소를 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사 먹거나 배달하는 음식은 가격과 메뉴가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시장에 가면 봄에는 주꾸미가, 여름엔 토마토가 제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4월만 해도 7천 원씩 하던 토마토가 5월이 되니 한 팩에 3천 원씩 나온다. 가격에 민감하지 않아도 장에 가면 철마다 때마다 바뀌는 진열장을 볼 수 있다. 늦겨울엔 딸기, 초여름엔 참외. 제철 채소와 과일은 가격도 좋고 맛도 좋다. 또 가격에 민감하지 않더라도 계절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대인이 누리기 힘든 소소한 사치이기도 하다. 지독한 더위와 몇백 년 만의 추위로만 계절을 체감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마다 자연이 내놓는 한밭 차림을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제로 플라스틱
또 하나의 장점은 사실 예전엔 장점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인데, 바로 환경보호이다. EBS에서 '제로 플라스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제로 플라스틱을 실천하시는 분이 장을 볼 때 따로 장바구니와 집에서 사용하는 밀폐용기를 챙겨가서 따로 일회용 비닐봉지나 일회용 랩, 스티로폼 등의 포장재를 받지 않는 것이다. 요즘은 마트에서도 장바구니 쓰기를 권장하고 있긴 하지만, 마트에서는 기본적으로 소분해서 이미 포장된 식자재를 많이 파는 한편, 시장에서는 중간 포장 비닐 없이 바로 장바구니에 담아 갈 수 있다.
4. 21세기의 호사
사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소리라는 걸 안다. 프리랜서 대학원생이라는 다소 대안적인 생활방식을 갖고 있기에 자주 시장에 가서 장을 볼 시간이 있다는 것도. 언젠가부터 세상이 미쳐 돌아서 괜찮은 레스토랑 가는 것보다 시장에서 장 봐서 밥해먹는 게 더 호사처럼 느껴진다. 잔뜩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화풀이용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밀어 넣는 사료가 아닌 먹거리. 매 끼를 그렇게 정성을 쏟을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귀찮고 기력이 없어서 라면을 먹는 횟수는 조금씩 줄어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