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없는 인도
잠은 쉽게 들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꿈에 시달렸다. 열 수 없는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에어컨 소음만 위잉하며 어두운 공간을 흘러 다니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하고 잠시 떠올렸으나 이내 인도에서 첫 하룻밤을 보내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렸다. 시공간이 달라짐에 따라 내가 점차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새벽 세시에 일어나던 습관은 시계를 찾아 인도 시각으로 새벽 세시임을 확인해 보니 여기서도 심지어 시차가 달라졌음에도 여전하구나 싶었다. 나름 간략하게라도 견결하게 아침 예불을 할까 싶었지만 좁은 침대만 있는 곳이라 할 수도 없었고 머리맡에 놓은 자리끼를 찾아 마시니 이내 곧 피곤이 몰려와 다시 몸을 뉘었다.
깨어난 건 해가 이미 중천에 뜬 무렵이었다. 여기서 2박이나 3박을 묶을 예정이라 급할 건 없지만 11시가 넘은 시간까지 잠을 자본 건 근래 없었던 일이었다. 다음 여행지로 갈 표를 예매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거리를 지나다닐수록 예상했던 인도풍의 건물은 거의 볼 수 없고 영국풍의 커다란 석조 건물들이 곳곳에 마치 서울역 건물이나 혹은 철거되기 전 경복궁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처럼 유럽풍의 건물들이 위엄 있게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우랑가바드행 기차표 티켓을 예매하러 간 빅토리아 역(차트라파티 쉬바지역) 은 압도적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나한테는 너무 생경한 고딕풍의 건축은 내부도 깔려 있는 철도 레일 규모도 어마 어마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지어진 서울역과 영국 식민지 시절 지어진 빅토리아역( 그네들 이름인 차트라파티 쉬바지역)은 같이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것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렇다면 인도인들은 영국식민지로 인해 근대화 가 되었다 주장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역이라는 이름조차도 사실 무려 인도 황제로 즉위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온 어찌 보면 치욕스러운 이름인 게다가 철도를 인도 전역에 설치한 이유도 막대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고 거기에 지방에 반란군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 영국군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이용된 것이 철도망인데 이를 빌미로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도인 스스로가 심지어 그들은 철도 기술은 커녕 철도를 이용도 쉽게 허용되지 못했던 인도인들이 식민지로 인해 근대화가 되었다고 스스로 주장한다면 얼마나 볼쌍스러운 일인가 생각하였다.
서양인들의 영어도 어려운데 인도인들의 영어는 더욱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기차 시간표가 있는 타임 테이블을 구입하고 아우랑가바드를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려고 했지만 표는 이미 매진이었다. 대안으로 버스가 있었고 대략 시간으로는 적게는 8시간 많게는 10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했다. 비싼 물가의 뭄바이에는 오래 머무르기도 어렵거니와 계속 있고 싶지 않은 편하지 않은 곳이었다. 특히 박시시. 채 세네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커다란 눈망울로 내손을 느닷없이 잡고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손짓을 하는 것을 처음 경험한 순간 그 어린아이의 아찔한 손 내음은 두고두고 충격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음에도 상상도 했음에도 정말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너무나 어린아이를 안고서 박시시라고 하는 구걸을 하고 있었고 나는 가지고 갔었던 캐러멜을 던지다시피 해서 주고는 얼른 나는 그 자리를 피했었다. 더구나 몬순 시즌의 이 시기에 저렇게 어린아이를 안고 다니며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폭우를 잠시 피하다 말다 하며 박시시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티브이에서 보던 아프리카 난민들보다 더 처량해 보였다. 자기에게 먹을 것을 달라며 신발도 신지 않은 눈망울만 가득한 어린아이가 내 손을 잡았을 때의 그 소스라치게 느껴졌던 손 내음은 땀에 내내 절어 있던 복대와 대비되며 인도 여행 내내 스스로 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버스터미널로 가서 내일 아침 아우랑가바드로 출발하는 버스 티켓을 샀다. 그리고 다시 숙소 근처인 타지마할 호텔로 왔다. 타지마할 호텔 옆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비싸 보이는 오픈카들이 바쁘게 돌아다니지만 그 한구석 좁은 골목에는 그냥 노숙을 하는 '가족'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아 구걸을 하였다. 가난한 나라일 수도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계급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인도 카스트. 그들의 직업이나 그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좁고 어두운 골목길에 노숙하는 이들은 카스트에 속하기는 하는 걸까 싶었다. 인도 여행을 다니다 보면 외모에서도 그들의 계급을 어느 정도 가늠이 될 수 있었다. 몸매가 왜소하고 얼굴이나 몸의 색이 어두울수록 낮은 계급인 거로 여겨지고 덩치가 좋은 백인에 가까운 이들은 대개 높은 계급으로 이들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꼭 내 이름을 물어보곤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름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계급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고 자기 이름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건 이미 자기 계급이 높기 때문이거니와 자기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비슷한 계급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부처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런 나라였기에 부처라는 깨달은 자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짐작을 해본다. 사실 아우랑가바드를 가는 이유도 불교 유적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 오래전 불교 수행자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래서 일부러 불교문화유산이 있는 엘로라와 아잔타를 가볼 수 있다는 아우랑가바드를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는지도 궁금하였다.
오토릭샤를 통해 뭄바이를 이동하곤 했는데 이 릭샤왈라들은 탈 때마다 고역이었다. 가이드북에 적혀 있는 오토릭샤 비용을 참고로 그보다는 더 주겠구나 예상을 했었지만 이들은 심지어 50루피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내가 외국 배낭여행객인 것을 당연히 감안하는 듯 50 달러라고 요구하는 일은 너무나도 흔하게 겪은 일이었다. 50루면 당시 환율로 우리 돈으로 약 1,500원이고 50달러는 대략 8만 원인 아주 큰 차이임에도 이들은 달러를 요구하다가 강하게 대응하면 자기가 양보한다는 듯이 루피로 하지만 그것도 외국여행객 바가지를 씌운 금액으로 부르곤 했다. 인도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악명이 높았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어디로 데려다 줄지도 모르는 운행 수단에 나를 맡기고 간다는 일 자체와 더불어 거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바가지로 인해 매번 싸워야 하는 일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물 하나를 살 때도 바가지인 거 같고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도 나한테 위생은 커녕 혹여 이상한 약물을 넣은 것을 주진 않았을까 의심하게 되었고 오토릭샤를 타고 이동을 할 때마다 나를 이상한 곳에 데려가 운전하던 릭샤왈라의 일행들이 나를 폭행하며 내배에 있던 복대를 빼앗아 가는 강도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며 뭄바이에 온날부터 내내 인도인 모두를 의심하였다.
사람에 대한 의심은 나를 가두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인도뿐 아니라 한국에서든 어디서든 나와 그들은 다를 것이라고 구분을 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 되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과 나는 정서적으로 벽이 세워지고 그러는 동안 나는 고립되고 만다. 물론 나와 그들이 다를 것이라고 단정하는 일도 무모한 일이지만 대걔 내가 싫어하는 일은 그들도 꺼려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들도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들과 같다고 한다면 역시 무모한 일이긴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들과 다를 수 있지만 같을 수 있다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나은 태도 일 텐데 살면서 대걔 그러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나를 이해한다고 믿게 되는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래서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을 부르짖게 만드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남과 나를 구분했다. 남들과 나를 구분하는 시간만큼 오직 그녀에게만 소통하며 2년의 시간을 견뎌왔었다. 그녀와 나는 양방향적인 소통을 했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일방적인 의존관계는 아니었을까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같이 공감하고 같이 좋아하고 같이 의지하였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나만 그렇게 인식하였구나 여겨졌다. 그러한 인식은 시간에 따라 또 어떻게 달라질 거인지 아니 사람과 사람사이 있었던 순간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인지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린 어쩌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서로의 오해를 오해하며 살아가는 존재 일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고 있으니 난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었다.
고립된 나는 나를 이해하고 받아 들일수 있는 세상이 존재할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출가를 했었고 출가를 했지만 그 세계 역시 사람 사는 곳이었고 그래서 또 난 나를 받아들일 것만 같은 인도로 왔다. 처음 한 번이 떠나기가 어렵지 한번 떠나본 이는 쉽게 마다하지 않고 떠나는 것 같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안 샐 수도 있을 것 같단 기대하에 그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는 밖을 찾아 말이다. Earwax 란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귀지다. 나는 귀지가 영어로는 ear wax 로 표현되고 그 단어의 의미가 너무 잘 와닿았다. 내 귀의 귀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난 남들도 당연히 귀지가 나처럼 물귀지인 줄 알았다. 남들의 귀지가 딱딱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거의 고등학교 때였던 거 같다. 내 친형들의 귀지도 딱딱했으며 내 친구들도 딱딱한 귀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만 물귀지였던 것이다. 언젠가 읽어본 책에는 귀지가 딱딱하거나 물귀지인 것은 ABCC11이라는 유전자의 538번째 의 염기가 G 인지 A 인지 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GG 나 GA 염기 형태는 물귀지이지만 오로지 AA 의 염기 형태에서 만이 딱딱한 귀지를 가지며 이 딱딱한 귀지는 전 세계적으로 오직 중국 베이징, 상하이와 동남아 그리고 한국(특히 대구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글을 읽고 나니 내게 내가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에서의 관점에서는 내 주위의 남들 모두가 특이한 것 일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마치 외눈박이의 세계에서 양눈을 가진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라며 말이다. 그런 생각은 계속 자가 발전했다. 내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틀린 것이고 내가 제출한 시험 답안이 오답이 아니라 출제된 시험 문제 자체가 잘못 낸 것이며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내 탓이 아니라 모두 다 남들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부인할수록 나는 고립되어 갔다. 자타불이(自他不二) 를 말하던 불교는 한국에서도 없었고 인도에 와서도 없었으며 세상 어디에도 동체대비(同體大悲) 의 불교는 적어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인도에 와서도 혼자 고립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