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하은의 이야기
크리스마스이브날 종강 했던 학원이 해를 넘기고 문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의 술자리를 그를 포함한 학원사람들과 같이 했던 하은은 그가 바래다주던 집에 돌아온 후에야 그와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얼굴 빨개지는 바보 같은 사람은 내 연락처도 묻지도 않았고 자기 연락처를 알려주지도 않은 채 이승환 시디를 달랑 하나 사다 주고는 집에 가버렸던 것이다. 이름과 나이만 술자리 모임에서 겨우 알았으나 연락처를 모르는 상태이고 같이 다니던 학원의 강의는 종강을 했는데 그가 다시 다닐 거라는 이야기도 건네 듣지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라 서로 이야기를 한건 겨우 몇 마디였고 예상치 못하게 그가 나를 집에 바래다주는 동안에도 서로 나눈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은 채 연락처가 없는 그는 이승환 시디로만 남은 상태였다. 대학교 방학은 진작에 했고 유일하게 나가던 학원도 종강을 했는 데다가 거기에 교회도 띄엄띄엄 다니고 있으니 좀처럼 밖에 나갈 일이 없었기에 더욱더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답답했다. 그러고 보니 난 시디플레이어도 없는데 그는 도대체 왜 뜬금없이 집 앞 레코드 가게를 들어가 내게 묻지도 않은 이승환 The show(live)시디를 선물을 한건지도 당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왜 말할 때마다 얼굴이 빨개 지곤 하는 걸까. 그가 준 시디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과연 그가 학원에 다시 등록해 나오긴 하는 걸까. 집안에 있는 동안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남진이는 새해가 가기 전날 교회에 꼭 나오라고 내게 당부를 했다. 어머니는 그날 회사 일이 있어 집에 늦게 들어올 예정이라고 했고 복층에 같이 사는 형부와 언니도 일출 여행을 간다며 번잡스럽게 아침부터 준비하더니 나가 버리고 난 후 한 해 마지막 날의 집안에 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외로웠고 무서웠다. 남진이가 부르지 않았어도 아마 교회에서 한해 마지막날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본 남진이는 환한 웃음으로 하은을 맞이했다. 교회의 송구영신 예배는 여전히 따뜻했고 생명수 같은 축복이 가득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했다. 하은과 남진은 서로에게 새해를 축하하며 서로의 복을 빌었다. 예배를 마친 늦은 밤 남진은 하은을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하은의 어머니와 간단히 인사한 후 남진은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은은 다시금 얼굴 빨개지는 그가 떠올랐다. 설날 연휴가 지나고 다시 나온 학원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찾은 건 아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같이 다니던 친구와 학원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내내 그는 보이지 않았다. 새해 새로 개강한 영어 학원을 다니는 일주일 동안 보이지 않는 그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애써 여기다가 혹시 다른 시간대에 듣는 건 아닌지 해서 괜히 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혹시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걱정도 하다가 주말이 기어코 다가오도록 그 사람이 보이지 않자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화가 났다.
그는 그러고도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학원에 나왔다. 원래도 말라 보였는데 마스크를 낀 얼굴이었음에도 더욱 말라 보였다. 만약 다시 보게 되면 이미 마음이 짜게 식은 거 같기에 별 감정이 안들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막상 다시 보게 되니 그런 마음보다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더 앞섰던 것 같다. 수업시간이 지나고 뒤늦게 들어온 그는 내 옆 자리에 앉아 내게 눈인사를 했다. 마스크를 쓴 얼굴임에도 빨개져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준 이후부터 감기에 걸렸었다고 했다. 조금 심하게 걸려서 그간 학원에 나오지 못했다고 수업이 끝나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강의실에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내게 이야기를 했다. 말이 거의 없던 예전과 달리 자기의 그간 사정을 한참을 쏟아 내던 그가 괜찮다면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따라간 곳은 학원 근처 좁은 골목에 위치한 다찌 좌석만 있는 아주 조그마하고 허름한 즉석 가락국수와 짜장면을 파는 집이었다. 추운 겨울 쑥갓과 아부래기 유부가 가득한 김이 폴폴 나는 가락국수는 참 맛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그가 밥값을 내려고 했다. 앞으로 계속 같이 먹을 텐데 한쪽만 계속 내면 부담스워지니 나눠 내자고 돈을 지불하려던 그의 손을 잡고서는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했다. 그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96년 겨울이었다.
하은의 아버지는 생전에 은행을 다니셨다. 본점에서 근무하셨다고 한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수성가한 경우라고 들었다. 실제 친가 쪽 분들은 그리 부유한 것 같지는 않았고 왕래도 자주 있지 않았지만 종종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기도 했었다. 어머니의 집안쪽은 한국 사람 누구라도 아는 항공기업의 집안이었다. 어머니가 직계는 아니었지만 멀지도 않은 사촌관계였고 영향력도 상당하였다고 한다. 결혼 당시 어머니 쪽 집안사람들은 아버지를 못마땅해했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에는 친정 식구들과의 왕래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에도 어머니는 외가집 쪽 신세를 어떻게든 안 지려고 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섬세하였고 병약했었다. 단출하지만 기품이 있었고 여유가 있는 시간이면 혼자 서재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으셨다. 가족에 자상했고 특히 하은에게는 더없이 좋은 아버지였었다. 그런 아버지에 반해 어머니는 강했다. 외갓집식구들 특히 여자들은 좀 드센 편이었고 그런 영향이었는지 어머니의 성격도 강한 편이었다. 하은의 언니도 하은도 사실 어머니와 셩격이 많이 닮아 있었다. 하은은 자신의 그런 성격을 싫어했다.
그와 하은은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면 같이 점심을 먹었다. 수업을 같이 듣고 점심을 같이 먹긴 하지만 이게 사귀는 상태 인지는 하은도 긴가민가 한 상태였다. 달리 보면 그냥 학원에서 스터디를 같이 하는 사람과 뭐가 다를까 싶었지만 그래도 그와 같이 있으면 좋았다. 어느 날 저녁 신촌 근처에서 같이 목살에 소주를 마셨다. 드럼통이 놓여 있는 곳에 연탄으로 구워 먹는 목살은 고기도 그렇지만 사실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고 맛있었다. 그냥 학생에서 이제야 어른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고기 냄새 폴폴 나는 채로 같이 하은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맨 뒷 좌석에 나란히 같이 앉은 그는 말없이 처음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날 그는 집 앞에서 가벼이 나를 안아주고 헤어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서로 색이 다른 더플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하은을 데려다주었다. 서울의 끝과 끝임에도 그는 항상 하은의 손을 잡고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항상 맞잡은 손 내음은 하은에게도 언제 어디서고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초봄 어느 날 저녁 하은의 집 앞에서 처음으로 둘이 입을 맞춘 날 그의 심장소리가 하은에게 까지 들려왔었다. 어쩌면 그 심장소리는 내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은은 생각했고 그 소리가 한편으로는 그에게도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그가 처음 하은을 바래다준 크리스마스이브 날 지하철이 끊겨서 집에 걸어갔었고 이후 심한 감기에 걸렸단 이야기를 들은 날이었다.
그는 수도권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하은보다 4살이 많은 군대를 다녀온 이였다. 복학을 앞두고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원래는 영어학원을 마치면 아르바이트를 근처 박물관에서 하고 있었다고 했다. 서로 개강을 하고서는 예전과 같이 자주 만나기는 어려웠다. 하은의 학교는 신촌에 있었고 그는 경기 남부에 학교가 있어 하루를 마감할 때쯤에 그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매일 같이 그날의 일상을 공유하였다. 가끔 그가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었다. 그의 목소리는 참 좋았다. 어느 날 늦은 밤 그가 전화를 통해 노래를 불러주는데 그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버럭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라고 크게 이야기를 하는 게 수화기 너머 들렸고 그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하은은 그의 집안이 엄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상황이 우스웠지만 그가 또 얼굴 빨개지며 민망해하겠구나 걱정이 되었고 만날 때 내색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섬세하고 다정했던 하은의 아버지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 일이 있은 이후 그는 한동안 통화를 하지 않았고 만남을 여러 사정을 핑계로 미뤘었다. 하은은 그가 겨우 나를 이 정도로만 생각을 하는 건가 살짝 서운 했었다.
개강을 하자 예전에도 그랬듯 남진은 약속도 없이 학교 앞에서 하은을 기다려서 놀래키곤 했다. 그런 남진이 고맙고 반가우면서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은은 남진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지 잠시 고민을 했었다. 그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남진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만나는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남진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 것을 하은도 느낄 수 있었다. 남진이 드러나지 않도록 기분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하은도 예상한 만큼 한편으로는 안심을 그리고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지 궁금하다고 얼굴 보여달라며 남진이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하은은 남진에게 그를 보여주고 싶었었다. 강남역 카페에서 그에게는 미리 알리지 않고 같이 보기로 했다.
남진과 하은은 강남역 카페에서 마주 보고 앉아 그를 기다리며 일상의 대화를 했다. 남진과 있을 때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카페 주위의 여자들이 남진을 보고는 수군거리는 것을 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 오는 그는 웬 남자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하은을 보니 놀라며 살짝 멈춧거렸다. 하은은 반갑게 웃으며 자기 옆에 앉으라고 했고 남진을 소개했다. 그는 남진이 모델임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오랜 교회 친구라고 소개했고 다행히 금세 밝게 그는 남진과 인사를 했다. 남진은 하은의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계속 자랑을 하기에 누군지 궁금했다고 했다. 그러며 그가 너무 괜찮은 사람 같다며 다행이라고 남진이 그에게 이야기했다. 하은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도 둘은 계속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진은 자기 스케줄이 있다며 먼저 일어났다. 남진이 가자 그는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청바지 모델이라고 이야기를 하니 그는 놀라며 더 환하게 웃었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들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자기도 느꼈다고 했다. 그날 그는 하은에게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은에게 잘해 주었다. 하은은 그가 혹여 이상한 질투를 하지 않을까 하는 잠시 염려했던 것이 미안해졌고 정말 그는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짐과 동시에 남진에게서도 그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