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지오 Nov 24. 2021

할머니와 보내는 10분

소중한 사람


나는 할머니와 같이 산다. 30년 넘게 살고 있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생활하신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업으로 바쁘셔서 조부모님이 나를 키워주셨는데, 그때의 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초등학생일 때 부모님과 2년간 지낸 것 외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컸다.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먼저 곁을 떠나셨다. 이제는 할머니의 곁을 가까운 곳에서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할머니는 부지런하시다. 아침에 일어나시자마자 아침 식사를 준비하시고, 식사를 마치시면 바로 설거지를 하신다. 설거지가 끝나면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신다. 얼마나 꼼꼼하신지, 액자 틀에 쌓인 먼지 하나 놓치시는 법이 없다. 이후에는 손톱 손질을 하시고, 고무 밴드로 체조를 하시고, 좋아하시는 시사 프로그램을 보시면서 여주차나 커피 한 잔을 즐기신다. 간혹 떡이나 꿀과 튀긴 찹쌀로 빚은 다과를 곁들이기도 하신다. 오후에는 낮잠을 주무시거나 저녁 찬거리를 만드신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신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오셨다. 할머니의 삶은 그날그날 조금씩 다르지만 결은 항상 같다.


혼자 계실 때는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내시지만, 누군가와 같이 계실 때는 그 사람과 하루를 채워 가신다. 그분이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가 없으니 그 역할을 내가 해야 한다. 마침 내가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집에서 작업하는 날이 늘었다.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있는 시간 역시 늘었다. 할머니는 나하고 함께 지내는 날이 많아져서 좋아하신다. 손자와 나누는 수다가 할머니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이다.


나는 여유가 있으면 얼마든지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다. 같이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백화점에 외식하러 가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바쁠 때였다. 나는 '멀티 플레이'가 안 됐다. 할 일이 있으면 그것만 했다. 본업과 브런치 작업으로 정신없으면 다른 일은 제쳐 뒀다. 그래서 작업을 시작하면 밥을 먹거나 화장실 갈 때 빼고는 방에서 몇 시간이고 안 나왔다. 오직 일에만 집중했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다. 이때 할머니는 거실에서 조용히 소일거리를 하셨다. 할머니는 바쁘게 일하는 내가 기특하다고 하셨지만, 내심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서운해하시는 듯했다. 할머니와 마주 보며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이 전부였다. 그때는 할머니의 표정이 유독 밝았다.


지난 9월 말, 할머니와 나는 오랜만에 불고기 전골을 만들어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할머니를 쳐다봤는데 그날따라 할머니 얼굴에 새겨진 주름과 피어오른 검버섯이 선명하게도 눈에 띄었다. 할머니의 손은 얇았고, 숟가락은 그 손안에서 불안정하게 자리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알 수 없는 슬픔이 몸속 저 아래에서 밀려 나오려고 했다. 나는 슬픔을 속으로 애써 다시 밀어 넣었다. 노인의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다는 말이 떠올랐다. 괜히 눈물이 났다. 할머니는 놀라신 표정으로, '아가, 왜 울고 그러냐'라고 하시며 나를 안으셨다. 나는 할머니를 꽉 안아드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결국 가족이 먼저다. 일이야 다시 하면 된다.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라고.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10분 보내기'라는 원칙을 세웠다. 1시간 작업했으면 10분은 거실로 나와 할머니와 담소를 나누는 것이다. 효과는 백 점 만점이었다. 나는 일과 효도 양쪽을 취할 수 있었다. 짧게 여러 번 대화하니까 할머니도 집안 살림과 여가 사이에균형을 찾으셨다. 너무 바쁠 때는 두 시간에 한 번으로 줄이거나, 일의 진행 속도가 괜찮으면 10분을 30분으로 늘리기도 했다. 아무리 바빠도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을 꼭 마련했다. 바빠서 못한다고 했던 것들을 전부 누릴 수 있었다. 바빠서 못했던 것이 아니라 핑계로 못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에 여유를 찾았다. 할머니와의 산책과 외출도 전보다 편안해졌다.


사실 별거 아닌 원칙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행복해하셨다. 계 모임에 나가시면 친구분들에게 나에 대해 자랑하셨다. 집으로 돌아오시는 할머니의 발걸음은 가벼우셨다. 할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후, 가족에 대한 나의 마음은 각별해졌다.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는 더욱 그러하다. 언젠가는 할머니도 내 곁을 떠나신다. 그날 감히 헤아릴 수 없 슬픔이 찾아올 것이다. 그 슬픔을 조금이나마 견디려면, 지금 더 잘해 드려야 한다. 매번 부족해서 할머니에게 죄송스럽다.






바쁨은 삶에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소중한 존재를 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일이 그렇다. 좋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면 성과는 확실해진다. 성과를 맛보는 순간 바쁨은 필연이라고 스스로 치부한다. 내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할 때, 나의 소중한 누군가는 세월과 함께 나이 들어간다. 나를 낳아 길러 주신 가족이 그렇고, 내 곁에 머무는 연인이 그렇고, 내 등을 두드려주는 친구들이 그렇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들은 어느새 전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가. 후회해도 이미 세월이 우리에게 벌을 내린 이후이다.


소중한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그들 누어야 한다. 시간은 남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내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하루에 10분을 쓰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일에도 그 시간을 쓰지 못할 것이다. 연말이다. 2021년의 끝이 다가온다. 바람이 차졌고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2월에 할머니를 모시고 깨끗하고 따뜻한 리조트에 다녀올까 싶다. 그곳에서 할머니와 행복한 추억을 만들 계획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쁜 요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