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우아함, 성능
때는 2020년 10월 초였다. 친한 선배와 술자리를 가졌는데 선배가 시계를 차고 나왔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스위스 시계였다. 그날따라 선배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조명이 시계 유리를 통과해서 다이얼에 박혔다. 자개의 은은한 빛깔이 유리 밖을 뚫고 나왔다. 브레이슬릿(시계줄)은 스틸 소재였다. 단단함이 느껴졌다. 시계 알 크기는 39mm였는데 선배의 셔츠 속으로 무리 없이 들어갔다. 초침이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그 모습은 아늑했다.
나는 그간 옷에는 투자했었지만 시계에는 소원했었다. 시계는 무조건 상위 브랜드로 한 번에 가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대중적인 스위스 시계 브랜드로 불리는 롤렉스, 오메가, 까르띠에 말고도 훌륭한 브랜드가 많으니 매장에 가서 착용해보라고 그는 조언했다. 시계의 세계는 훨씬 깊고 넓음을 선배는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 회사에서 독립하고 근 1년 간 새로운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고생하는 나를 위해 선물 하나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며칠 동안 시계 브랜드를 조사했다. 그렇게 찾은 브랜드가 '론진'이었다.
시계 브랜드의 이미지는 여러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역사, 기술력, 디자인, 가격대, 고객 소통, 희귀성, AS 등 다양하다. 시계 마니아들은 대체로 브랜드의 '역사(헤리티지)'와 '기술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긴 풍파를 겪은 만큼 기업 운영이 안정적이다는 뜻이고, 기술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시간 측정이 정밀하고 마감이 세밀하며 내구성이 높은 시계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는 이 두 가지 조건을 거의 다 충족한다. 100년 이상의 역사는 기본이고 진보된 제작술을 보유하고 있다.
론진이 그러하다. 론진은 1832년에 설립되었다. 올해로 설립 190주년을 맞이한다. 론진의 브랜드 명과 로고는 1893년 국제 지적 재산권 본부(세계지적재산권기구 WIPO의 전신)에 세계 최초로 등재되었다. 이밖에도 세계 박람회 석권, 국제 항공 연맹의 공식 공급업체, 올림픽 타임키퍼, 자체 무브먼트 개발 등 론진은 굵은 발자취로 가득하다.
론진은 품질도 우수하다. 2세기 가까이 쌓아온 노하우가 론진 시계에 담겨 있다. 선명한 로고 프린팅, 일정한 초 간격, 매끈한 다이얼, 풍성한 야광 도료, 입체적인 양각, 풍부한 라인업이 시계의 격을 높인다. 여기에 ETA 무브먼트*를 더한다. 론진은 스위스의 제조 회사 그룹, 스와치 그룹 소속이다. 스와치 그룹에는 ETA라는 무브먼트 회사가 있다. 이 회사의 무브먼트는 오랜 시간 검증되었는데 수리가 용이하고 튼튼하며 일오차가 적다. 이런 부품을 론진은 공급받는다. 적어도 론진의 품질은 폄하할 수 없다는 여론이 있는 이유이다.
무브먼트 –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 장치. 자동차 엔진과도 같다. 팔에서 전해지는 힘으로 무브먼트 내의 태엽이 감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한다. 그때 발생하는 태엽의 힘이 무브먼트를 작동시킨다. 무브먼트는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예민하다. 그래서 충격에 강하거나 자기장 영향을 덜 받거나 시간 오차가 작은 것이 고급이다. 시계의 핵심이기에 브랜드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개발한다.
론진은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시계로도 알려져 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즐겨 찬 브랜드가 론진이었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과 이탈리아 총리 마리오드라기 역시 론진을 애용한다. 故 이건희 회장이 삼성 임원들에게 론진의 드레스 워치를 선물한 일화는 유명하다.
나는 조사할수록 론진에 매력을 느꼈다. 유구한 역사와 뛰어난 기술력, 준수한 브랜드 이미지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대. 상위 브랜드로 넘어가기 전에 경험하기 알맞은 시계라고 나는 판단했다. 나는 시간을 내서 영등포에 위치한 롯데백화점을 방문했다. 도착하자마자 명품 시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번쩍거리는 시계 브랜드 매장들이 양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 앞에 Longines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매장에 들어서니 네이비 색 정장을 입은 남자 직원이 환영해주었다. 직원이 어떤 시계를 찾느냐고 물었다. 나는 V.H.P 모델을 구매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시계를 꺼내서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 시계가 이것이다.
V.H.P
론진의 쿼츠 시계이다. 쿼츠는 배터리로 구동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델은 연오차가 5초 미만이다. 일반적인 기계식 시계의 일오차가 10초 내외임을 감안하면 매우 정확한 것이다. 말 그대로 Very High Precision이다. 또한 퍼페츄얼 캘린더를 적용해서 2399년까지 날짜를 맞출 필요가 없다. 30일과 31일이 있는 달, 2월의 28일과 29일을 자동으로 계산한다. 강한 충격을 받으면 시계 핸즈(초침, 분침, 시침)를 재정열한다. 노트북, 스피커, 스마트폰 등 자기장이 나오는 물건 옆에 있어도 시간이 느려지거나 빨라지지 않는다.
원래 오토매틱 시계(앞서 말한 무트먼트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를 구매하려고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관리가 필요한 오토매틱 시계보다 간편하게 찰 수 있는 쿼츠 시계를 고르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VHP였다. 정밀성과 내구성을 동시에 잡아서 마음에 들었다. 마침 배우 정우성씨가 같은 시계를 차고 나온 광고를 보고 혹했던 터였다(웃음). VHP는 성능도 성능이지만 디자인이 빼어나다. 점잖은 패턴과 소재 덕에 어떤 스타일에도 어울린다. 구입 시기는 2020년 11월 7일. 당시에 130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
구매한 지 2년 가까이 되었다. 시간과 날짜가 알아서 조정되어서 편하다. 내가 할 일은 3년마다 CS 센터에 들러서,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 전체 점검을 받는 것이 전부이다. 내 돈으로 산 첫 스위스 명품 시계이다. 이 시계를 차고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소중한 이와 추억을 만들었고 찰나의 순간을 멋지게 간직할 수 있었다. 만족도가 높다. 이 시계는 평생 찰 예정이다.
시간이 흘러 2022년 3월.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깐 얼굴을 볼 수 있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짐을 챙겨서 다음 날 파주로 내려갔다. 어머니와 즐거운 식사를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할 말이 있으신 듯했다. 여쭤보니 수줍게 웃으시면서, '네가 이제 30대인데 변변한 선물을 못해주었구나. 시계를 사주려고 하는데 어떻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하러 돈을 쓰시냐. 마음만 받겠다'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거절하셨다. 어머니는 신용 카드를 건네셨다. '가격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걸 사라.'
나는 공손히 카드를 받았다. 아들인 내가 챙겨드려야 하는데 되려 받아서 죄송스러웠다. 그래도 모처럼 어머니가 챙겨 주시는 것이니 기쁘게 받기로 했다. 어떤 시계가 유의미할지 고민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다이버 워치'가 떠올랐다. 다이버 워치는 잠수용 시계이다. 방수 성능과 견고함이 빼어나다. 디자인은 스포티하기 때문에 캐주얼 룩과 궁합이 맞다. 요즘에는 디자인과 소재의 발전으로 클래식 스타일에도 괜찮다. VHP처럼 정적인 스포츠 워치와는 느낌이 달라서 하나 들이면 번갈아 착용하기에 적절할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론진을 선택하기로 했다. 롤렉스 서브마리너는 구할 길이 없고, 구할 수 있더라도 과도한 웃돈을 내야 했다. 오메가에는 씨마스터 300이라는 제품이 있는데 케이스 크기가 42mm라서 내 손목에는 무리였다. 블랑팡, 파네라이, 예거 르쿨트르의 다이버 워치는 아무리 어머니가 가격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어도, 감히 지불할 수 없을 만큼 고가였다. 태그호이어의 아쿠아레이서는 무브먼트의 수준이 아쉬웠다. 이런저런 브랜드를 물색했으나 론진만 한 곳이 없었다.
하이드로 콘퀘스트
론진의 다이버 워치이다. 무브먼트의 힘으로 작동하는 오토매틱 시계이다. 쿼츠로 시계의 메커니즘을 이해했으니 오토매틱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하이드로 콘퀘스트는 2007년부터 론진에서 전개하는 모델이다. 기본기에 충실한 다이버 워치여서 인기가 많다. 론진은 2018년에 신형을 출시했다. 구형과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먼저 인서트 베젤(사진에서 시계를 두르는 검은색 띠)을 알루미늄에서 세라믹으로 교체했다. 세라믹은 도자기 소재인데 경도가 높아서 스크래치에 강하다. 무브먼트는 항자성과 충격에 강한 무브먼트로 바꿨다. 다이버 워치답게 방수 성능은 300m이다. 물 걱정 없이 쓸 수 있다.
파워 리저브(시계태엽을 완전히 감았을 때 시계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의 길이)는 약 72시간이다. 시계 오른쪽에 있는 용두를 최대한 감으면, 3일은 착용하지 않아도 시계가 작동한다. 파워 리저브가 짧으면 날짜와 시간을 자주 맞춰야 한다. 하이드로 콘퀘스트는 그런 수고로움에서 자유롭다. 금요일에 풀어놓으면 월요일에도 시계가 살아있다. 긴 파워 리저브는 유용하다. 가격은 240만 원. 론진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에서 구매했다.
VHP와 달리 묵직한 맛이 있다. 무게감이 있는데 장시간 착용해도 손목에 부담이 없다. 무게 배분을 잘 설계한 듯하다. 야광은 푸른색이다. 어두운 곳에서 시계를 보고 있으면 시원한 바다가 생각난다. 브레이슬릿과 케이스는 유격 없이 맞물려 있다. 유격 방지는 시계 제작의 기본이다. 1부터 10까지 완벽해도 유격이 있으면 시계가 조악해 보인다. 론진은 그 한끝을 지켰다. 한 달 정도 차고 다녔는데, 지인들이 멋지다고 말해주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좋아하신다.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VHP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하고자 한다.
론진의 3대 가치가 있다. 전통, 우아함, 성능이다. 론진은 190년을 걸어오며 축적한 기술로 가격 대비 성능 좋은 시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시계를 우아하게 표현한다. 화려하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고급스럽지만 사치스럽지는 않다. 혹자는 론진을 '탄탄한 럭셔리'라고 평가한다. 명품 브랜드로서 지켜야 할 기본기가 확실하다는 의미이다. 직접 론진의 시계를 겪어보니 수긍이 가는 말이다. 만듦새가 최상위 브랜드보다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누리기에 충분한 것도 사실이다. 론진은 꽤나 균형 잡힌 브랜드이다.
지금 이 글을 동네 카페의 구석 자리에서 쓰는 중이다. 오늘은 하이드로 콘퀘스트를 차고 나왔다. 초침이 천천히 돈다. 분침과 시침이 그 뒤를 따른다. 지나간 시간은 물러가고 새로운 시간이 다가온다. 나의 삶은 론진 시계와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