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월요일 금요일에 학원 한 곳, 화수목에 학원 한 곳, 총 두 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월금 학원이 좋은 조건으로 정식 강사 제안을 했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장래를 생각했을 때 나쁘지 않을 듯하여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서 11월부터는 그곳에 정착하여 학생들과 호흡을 맞춘다. 수업 재량권이 높은 편이라 나름의 커리큘럼을 구성할 요량이다. 걱정이 일지만 두근거림도 미약하게 피어오른다.
비는 10월은 안식월로 삼았다. 바빠서 서울 밖을 돌아다닐 틈이 없었는데 이 참에 제주도로 떠난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면 이번에도 미뤄질 것 같아서, 제안을 받은 그날 바로 제주행 항공기 티켓이며 숙소며 알아보고 처리했다. 해외를 갈까 했지만 익숙하면서도 육지와는 먼 곳에서 거니는 게 속 편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주도가 그런 곳이다.
이런 상황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1년 가까이 다니며 정든 화수목 학원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강사 일을 처음 시작했다. 즉, 이곳에서 만난 아이들이 나의 첫 제자인 것이다. 그들 중 일부도 내가 첫 스승이다. 서툴렀음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다가가서 그들은 나에게 진로와 영어 공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고 나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름 살아온 경험에 빗대어 조언 아닌 조언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과 생각과 공부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가끔은 심술을 부리며 속을 썩였으나, 다음 날 머쓱해하며 나에게 사탕을 건네었던 아이. 성적이 부쩍 늘어 나에게 달려와 안겼던 아이. 꿈을 찾았다고 들뜬 마음을 편지로 표현한 아이. 영어 지문을 야무지게 분석하고 이에 관해 나와 의견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 아이. 다 열거하기에 어려운 그 아이들을 뒤로한 채 나는 떠나야 했다. 아끼는 제자는 내가 떠난다는 소식에 눈물을 보였다. 나는 옆에서 말없이 30분 간 앉아 있었다.
괜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화수목 학원 원장에게 나는 속마음을 꺼냈다. 원장은, 그 좋은 학원에서 괜찮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있겠냐면서, 오히려 나를 다그쳤다. 아이들도 결국 잘된 나의 모습을 축하할 것이고, 또 바랄 것이라고 원장은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나의 손을 잡아주었는데, 세상은 아직 따듯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사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었다. 평소보다 꼼꼼하게 수업을 준비해서 갔다. 수업 막판에는 앞으로 어떻게 공부할지, 어떤 어른이 될지, 힘들 때마다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지, 나는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순간이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에 나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나는 그들과 포옹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세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라는 말이 그들이 나에게 전한 마지막 인사였다. 나는 행정 업무까지 끝내고 원장과 인사를 나눈 후, 학원 문을 나섰다. 1년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10월에 제주도에서 밀린 독서를 할 계획이다. 돌아와서는 영어 공부에 더욱 매진하고자 한다. 물론 이 모든 일에는 화수목 학원 아이들의 응원이 깃들어 있을 터이다. 그 응원을 발판 삼아 나는 다시 저어갈 채비를 한다. 시작과 이별은 맞물리며 공존하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