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전성기라는 것이 있다.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난다. 모든 기운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착각마저 든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매 시즌마다 경이로운 매출을 기록한다. 이 시기는 브랜드의 찬란한 과거로 기억되며 훗날 '전설'로 회자된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셀린느도 영광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바로 2008년-2018년. 총 10년간 그들이 보여준 행보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했다. 그 이유는,
Less is more 적을수록 낫다
셀린느의 브랜드 철학을 가장 독보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 브랜드 가치는 날로 높아졌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상승이 있으면 내리막 길도 있는 법. 현재 셀린느는 기로에 서 있다. 과거의 영광을 다시 누릴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여타 브랜드처럼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말이다.
복잡한 것은 아름답지 않다
1945년 셀린느 비피아나(Celine Vipiana)는 남편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Celine를 창립했다. 당시 셀린느는 어린아이들의 맞춤 신발을 만드는 공방이었다. 두 부부는 물건에 대한 철학이 남달랐다.
<물건은 복잡하지 않고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성인보다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아이들이 장식이 많아 무겁고 튼튼하지 않은 신발을 신으면 다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장식은 최소화하고 기능에 충실한 신발을 만드는데 노력했다.
1945년대 셀린느 신발 광고
두 부부가 만든 셀린느 아동 신발은 다른 브랜드 신발보다 훨씬 가볍고 튼튼했다. 또한 단순하게 만들어져서 수선도 용이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금방 알아본다. 창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부모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고 셀린느의 인기는 점점 많아졌다.
이 흐름에 힘입어 셀린느는 1950년대 이후부터 여성 신발, 여성 액세서리, 여성 스포츠 의류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당시 여성 의류는 화려한 패턴과 자수로 장식된 옷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옷을 만드는 브랜드가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셀린느는 개의치 않았다. 끝까지 자신과 남편이 함께 생각했던 Less is more를 고수하며 브랜드 가치를 지켜나갔다.
성장은 순탄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셀린느의 미니멀하고 세련된 디자인에 열광했다. 다른 대형 패션 브랜드에 비해 작은 규모이지만 훌륭한 팬덤이 받쳐준 덕분에 빠르게 발전했다. 이를 눈여겨본 *LVMH 그룹 CEO '베르나르 아르노(Bernald Arnault)'가 1987년 셀린느에 투자했고, 1997년 셀린느 비피아나가 사망 후 그룹 산하로 인수했다.
LVMH -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다국적 명품그룹이다. 루이비통, 크리스찬 디올, 펜디, 셀린느, 세포라, 지방시, 불가리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실용성 더하기
LVMH는 셀린느의 Less is more가 브랜드의 핵심 성장 동력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다. 그래서 이를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해 1997년 베르나르 아르노는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를 셀린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했다. 미국 태생인 그는 미국 특유의 실용성 높은 디자인을 셀린느에 가미했다. 넉넉한 실루엣의 의류와 실생활에 유용한 가방 등이 그 예이다.
Celine by Michael Kors in 1998 Campaign
기존의 셀린느가 다소 여성스러웠다면 마이클 코어스가 합류한 이후 좀 더 중성적인 매력을 지니게 됐다. 옷 품이 넓어 입었을 때 편했고 불필요한 데코가 없어 오랫동안 입기 좋았다. 당시 9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스타일을 셀린느에 어울리게 재해석했다.
2004년 마이클이 퇴임 한 이후 두 명의 수석 디자이너가 셀린느를 지휘했지만 2007년까지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화려한 원색이나 복잡한 패턴 사용 혹은 애매한 아메리칸 스타일을 차용하여 기존의 셀린느와 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가 처음으로 셀린느의 Less is more 철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피비 파일로(Phoebe Philo)와의 운명적 만남
그러던 2008년. 드디어 셀린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피비 파일로가 셀린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된 것이다. 피비 파일로는 당시 끌로에(Chloe)의 디자이너로 명성이 자자했다.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던 끌로에를 단숨에 성장시켰으며 기복 없는 디자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깔끔한 일처리와 부드러운 카리스마 그리고 패션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했기에 업계에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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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MH 그룹 CEO 베르나르 아르노는 그런 피비 파일로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몇 차례 직접 찾아가 그녀가 셀린느를 이끌어 주길 부탁했다. 그의 끈질긴 설득 끝에 피비 파일로는 셀린느에 합류했고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전설적인 컬렉션을 전개하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베르나르가 유독 피비 파일로를 눈여겨봤던 이유는 그녀의 성숙한 패션 철학 때문이었다. 피비는 여성들이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한 옷을 입길 원했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작은 옷을 억지로 입지 않았으면 했다. 언제나 쉽게 입을 수 있고, 편안하고, 로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명품으로 빛날 수 있는 옷을 선택하길 바랐다. 또한 딱 필요한 것들만 구비하여 오랫동안 입길 바랐다.
피비 파일로는 인터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
Women should have choices and women should feel good in what they wear.
-여성들은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들이 직접 고른 옷을 입고 행복해야 하죠.
I'm just not very interested in decoration. Fashion should be simple and comfort.
-전 장식에 관심 없어요. 패션은 단순하고 편해야 합니다.
I don't believe in making fashion difficult.
-패션을 어렵게 만드는 걸 원치 않습니다.
I do think that the world doesn't need may more frivolous bits and bobs that end up left in cupboards or landfills.
-세상은 결국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질 것들을 필요하지 않아요(즉, 필요한 것들만 만들어야 한다).
I really respect the Brand that have their Core.
-전 브랜드 핵심을 잘 지키는 곳을 정말 존경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녀가 평소 어떠한 생각으로 패션을 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셀린느의
Less is more
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피비 파일로의 부임 이후 셀린느는 날개를 단 듯 성장했다. 라인업이 전반적으로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실루엣을 자랑했고, 컬러는 무채색이나 부드러운 톤의 색깔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아이템에 로고를 장식하지 않았고 착용하는 사람이 돋보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세계 각 여성들이 셀린느의 팬을 자처하며 몰렸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진심으로 다가오는 피비 파일로에게 감동했다. 방탄소년단의 아미처럼 셀린느 팬들은 거대한 팬덤을 형성했고 브랜드의 강력한 지지자가 됐다.
그녀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전에 제품이 품절되기도 했으며, 다른 브랜드에서 더 높은 값으로 그녀를 스카우트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때 만들어진 피비 파일로 작품들은 발매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대로 거래되고 있다.
Celine by Phoebe Philo. 2015 FW Collecion.
Celine by Phoebe Philo. 2018 SS Collection.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옷들이 대체로 오버 사이즈다. 바지는 통이 넓고 상의는 어깨선이 내려와 있으며 코트도 소매가 긴 편이다. 전체적으로 옷들이 여유로워 입었을 때 편하다. 색상은 부드럽고 디자인은 미니멀하니 해가 바뀌어도 입을 수 있다. 옷으로서 아름다움과 기능이 둘 다 충적되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비를 막는다. 소재도 훌륭하여 입었을 때 여성의 매력이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그녀가 평소 지향하는 패션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런 컬렉션을 10년 동안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셀린느와 피비 파일로의 각 철학이 부합한 덕분이다. Less is more가 한 번 더 성숙하게 발전했고 그 결과 셀린느는 명품 브랜드로서 더욱 확고한 반열에 올랐다. 이것을 통해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브랜드 성장은 '명확한 브랜드 철학'에서 시작되고, 그 철학은 사람으로부터 발현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야 지속 가능한 브랜딩을 할 수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까
2018년을 끝으로 피비 파일로는 셀린느를 떠났다. 대신 그 자리를 생로랑과 디올 옴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이 이어받았다. 기존의 피비 팬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셀린느의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그간 에디 슬리먼이 보여준 디자인은 셀린느가 추구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New Celine by Hedi Slimane
사진을 보면 피비 파일로가 전개했던 컬렉션과 확연히 다르다. 좀 더 직선이 강조되고 패턴과 장식이 두드러진다. 아무래도 에디는 옴므 계열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쌓아왔기 때문에 피비와 다를 수밖에 없다. 셀린느에 그가 들어온 이후 남성 라인이 추가됐으며 타깃층도 어려졌다. 심지어 SNS 계정 하나 없이 진성 고객 중심으로 성장했던 셀린느는 현재 틱톡과 인스타그램을 활용하며 공격적인 마케팅도 운영 중이다.
기존 팬들은 최근 셀린느 행보가 너무 빠르고 과격하며 진심이 묻어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2018년 이전을 '올드 셀린느(피비 파일로)', 이후를 '뉴 셀린느(에디 실리먼)'로 부른다. 그만큼 피비 파일로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이다. 혹자는 10년 동안 같은 느낌으로 유지했으니한 번은 이미지 쇄신을 할 때가 됐다고 말한다. 또한 에디 실리먼의 부임이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좀 더 지켜보자는 평도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 또한 이번 셀린느 선택은 다소 아쉽다. 이들의 철학은 Less is more다. 그리고 그에 맞는 라인업을 오랫동안 소개하며 수많은 팬들을 모았다. 그런데 갑자기 농도가 달라졌다. 에디가 전개하는 셀린느 또한 달리 보면 깔끔하고 기능적일 수 있으나 전에 비해 과한 것은 사실이다. 피비 파일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기 전에도 셀린느는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 적 있다. 마이클 코어스가 애써 쌓아 온 이미지를 잘못된 디자이너 선택으로 무너뜨렸다.
물론 이번 새 디자이너는 검증된 사람이다. 이미 다양한 브랜드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셀린느의 기존 느낌과 결이 약간 맞지 않기에 에디와 셀린느 그리고 팬들의 합이 맞춰질 때까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셀린느가 선택한 과감한 행보가 과연 과거의 영광을 다시 누리게 할지 기대되는 바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단히 무언가를 더한다. 다른 사람과 차별성을 갖기 위함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더하면 더할수록 일이 풀리지 않는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삶에 여유가 없다. 차별은커녕 오히려 더 퇴보하는 기분도 든다.
우리 주변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생각보다 단순한 원리로 사는데도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는 것이다. 덜어낼수록 삶은 오히려 윤택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만 취해 빠르게 성장한다.
셀린느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함이 중요시 여겨지는 패션계에서 그들은 단순함에 집중했다. 옷의 본질이 무엇일까. 입는 것이다. 그러니 옷으로서 기능이 충족되어야 한다. 예쁘기만 하고 입을 수 없다면 소용없을 테니까. 기능만 좋아서 될까. 몸에 걸치는 것이니 편해야 한다. 동시에 품질이 좋고 유행을 타지 않아야 오래 입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옷의 본질이다.
셀린느는 이 본질에 집중하고 그 외의 것은 포기했다. 없어도 될 것들은 과감하게 제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다른 브랜드와 차별적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성장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다. 마치 우리네 삶과 같다. 생각보다 인생은 단순한 원리로 흘러간다. 통용되는 진리 몇 개를 중심으로 균형감 있게 흘러간다. 나머지는 전부 사족이다. 사족이 많으면 발이 무거워지고 결국 제 길을 가지 못한다.
Less is more.
인간의 삶이며 브랜드며 모두 적용되는 진리이다. 셀린느가 다시 이 철학을 곱씹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도와준 창립자의 귀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의 셀린느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 탈바꿈을 꾀하고 있다. 새로운 느낌으로 브랜딩을 전개하더라도 복잡한 수렁에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