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1인당 커피 소비력이 세계 1위인 국가이다. 전통 차보다 커피를 더 애정 한다. 우리에게 커피는 어떤 존재일까.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마시는 카페인 음료일까. 아니면 심심한 입을 달래기 위해 마시는 주전부리 음료일까. 사람들마다 커피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미국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Blue Bottle)'은 커피를 '맛'으로 해석했다. 작은 원두가 품고 있는 근본이 풍미라고 본 것이다. 블루보틀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커피 맛에 집착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며 커피를 마시려는 이유는 맛있는 커피를 즐기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2002년 창립 이후부터 줄곧,
the best Coffee
라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완벽주의자 커피를 만나다
"이 더러운 음악, 더 이상 하지 않겠어."
1999년, 프리랜서 클라리넷 연주자 '제임스 프리먼(James Freeman)'은 소속 교향악단에 사표를 던졌다. 무리한 스케줄, 과도한 연습, 불합리한 임금 등 모든 것이 그에게 상처로 남았다. 감정 없이, 명분도 없이 연주하는 현실에 회의감을 느껴 평생 함께한 음악을 그만뒀다.
음악을 그만두고 어떻게 살지 고민하던 찰나, 눈에 들어온 것이 '커피'였다. 제임스는 지인들 사이에서 소문난 커피 마니아였다. 원하는 커피 맛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을 정도로 입맛이 까다로웠다. 그는 자신처럼 예민한 커피 마니아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커피를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2002년, 미국 오클랜드 한 작은 마을에서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을 창립했다. 전 재산을 털어 허름한 창고를 임대하고 중고 로스팅 기계와 원두 자루를 구매했다. 목표는 확실했다. '최고의 커피 맛'을 구현하는 것.
James Freeman in 2002. Image source - Blue Bottle
마이웨이에 답이 있다
당시 스타벅스를 비롯한 대형 커피 브랜드는 평균적인 품질의 원두커피를 빠르게 공급하는 서비스에 초점을 맞췄다. 제임스는 이와 반대 전략을 선택했다. 전통 드립 방식인 '푸어 오버(Pour-Over)'와 고객 취향에 맞게 원두를 로스팅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지만, 원두가 가진 풍미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는 이러한 접근법이 커피 마니아들로부터 호응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2004년 제임스 프리먼은 오클랜드 농산물 시장에서 핸드 드립 커피를 판매하고 있었다. 그의 커피를 맛본 사람들은 시장이 열리기도 전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카트에 진열된 원두와 커피는 금세 동이 났다. 시간이 갈수록 블루보틀 커피를 좋아하는 팬들이 늘어났다. 이를 보며 제임스 프리먼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옳았음을 깨닫고 사업을 확장하기로 결심했다. 정든 창고 작업실을 정리한 후, 20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블루보틀 매장을 열었다. 인적도 드물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좁은 골목길에 있었지만 블루보틀은 한 걸음씩 발전해 나갔다.
음악과 커피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임스 프리먼은 그 감각을 활용하여 '완벽'을 추구한다. 밤을 지새우며 원두를 볶고 버리기를 반복하고, 하루에 몇 리터씩 물을 부어가며 커피를 내린 것도. '완벽한 커피 한 잔'을 위해서였다.
완벽주의자가 추구하는 커피
푸어 오버
블루보틀 매장에 가면 바리스타들이 '드립 포트(커피 주전자)'로 커피를 내리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원두를 곱게 갈아 종이 필터에 담은 다음 *드리퍼에 고정시키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붓는다. 그럼 드리퍼 아래 방향으로 원두를 통과한 커피 추출물이 떨어진다. 10분 정도 지나면 산뜻한 산미를 품은 커피를 맛볼 수 있다.
Image source - world coffee portal
*드리퍼: 여과지(종이 필터)를 끼운 후 분쇄한 커피가루를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커피를 추출할 때 사용하는 도구
푸어 오버는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신 물을 붓는 속도, 낙차, 온도, 원두 밀도 등 미세한 조절이 가능하여 에스프레소 머신보다 원두 맛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블루보틀은 느리더라도 푸어 오버를 브랜드 정체성으로 두고 있다.
언론에선 이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긴 서비스 시간은 장기적으로 고객 불만족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객은 오히려 블루보틀의 느린 커피를 마시기 위해 먼 거리도 마다치 않고 찾아왔다. 블루보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커피 소비자가 아니다. 깐깐한 기준으로 커피를 평가하는 준 전문가들이다. 이들에게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풍미를 즐기는 것이다.
현재 블루보틀은 푸어 오버 품질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기 위해 자사 바리스타들을 반복 교육한다. 신입 바리스타는 6개월 교육 이수 후, 제임스 프리먼 앞에서 직접 커피를 제조하고 기준점을 통과해야 한다(지점 상황에 따라 다른 관계자가 평가할 수 있다). 통과한 사람들은 3개월마다 재교육을 받으며 커피 핸들링을 발전시킨다. 심지어 바리스타가 아닌 타 직군 직원들도 푸어 오버만은 꼭 교육받는다. 현 블루보틀 CEO '브라이언 미한(Byran Meeh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If people take shortcuts on how that product is made or how that product should taste, then I don't think we have a future." - Bryan Meehan
구성원들이 커피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맛이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원 사이즈 컵
블루보틀 컵 사이즈는 오직 '12온즈(360ml)' 하나뿐이다. 블루보틀은 시행착오 끝에 12온즈 사이즈가 자신들이 사용하는 원두, 우유, 기타 재료의 풍미를 가장 잘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통상적인 카페는 스몰(S), 미디엄(M), 라지(L) 사이즈를 제공한다. 요즘은 1L 사이즈까지 제공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블루보틀은 양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고객을 위해 음료 사이즈를 다양하게 구비할 수 있지만, 최적의 맛을 보장하려면 어느 정도 타협을 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결국 맛이 훌륭해야 고객도 브랜드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커피는 커피 브랜드의 본질이다. 아무리 트렌디한 서비스로 무장해도 중축인 커피 맛이 흔들리면 브랜드가 어떤 길을 걸을지 모르는 일이다. 블루보틀은 창업 초기 때부터 커피 사업의 근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기교와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커피 그 자체에 집중했다.
완벽주의자가 추구하는 카페
공간은 커피 풍미를 깊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햇살 가득한 봄날테라스에 앉아 즐기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분위기 있는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즐기는 고소한 라떼, 바리스타들의 멋진 퍼포먼스를 눈에 담으며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 잔. 장소는 기대 이상으로 커피 맛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이유로 블루보틀은 커피뿐만 아니라 공간 디자인도 심혈을 기울인다.
개방형 매장
블루보틀 매장은 높은 테이블, 의자, 데스크, 진열대 등이 없다. 그래서 바리스타들이 커피를 제조하는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은 시야가 가려지면 무의식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 따라서 블루보틀은 고객이 앉았을 때 공간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매장 환경을 조성한다.
또한 고객의 눈 피로도를 낮추기 위해무채색 계열로 인테리어를 한다. 대한민국 성수동에 위치한 '블루보틀 성수점'은 벽면과 바닥이 화이트, 그레이, 연한 베이지 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간을 채우는 액자나 오브제 역시 자극적인 컬러가 없다.
Blue Bottle in SeongSu. Image source - leibal
보이스 트레이닝
카페에 가면 간혹 너무 큰 목소리로 주문을 확인하거나, 서비스하는 바리스타를 보곤 한다. 또는 바리스타들끼리 공격적인 어투로 대화하여 고객이 민망해하는 경우도 있다. 자극적인 소리는 커피를 즐기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블루보틀은 바리스타 보이스 교육에 신경 쓴다. 구성원들은 교육에서 목소리 높낮이와 언어 습관이 고객의 커피 소비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학습한다.
공간은 음식이나 음료가 더 맛있게 느껴지게 하는 애피타이저 역할을 한다. 블루보틀은 커피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고객이 블루보틀 커피 맛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도록 공간에 정성을 더한다.
브랜드가 성공하기 위해선 다양한 요인들이 맞물려야 한다. 단순히 역사가 깊다고 해서, 트렌드를 잘 따른다고 해서, 가격과 디자인이 좋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브랜드를 관통하는 철학을 '집념 있게 고수하는 것'이다. 많은 곳이 찰나의 유혹에 빠져 정체성을 잃어버리곤 한다. 지금까지 사랑받는 브랜드는 처음 다짐했던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
블루보틀이 그러하다. 커피콩의 깊은 풍미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늘 예민하게 반응하고 무엇 하나 편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이 피곤하다며 손가락질 할 것이다. 하지만 완벽을 기하는 태도가 오클랜드에서 시작한 작은 커피 가게를 글로벌 커피 브랜드로 성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