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람에 기대어
‘애매하다’는 말을 자주했다. 혀끝에 닿는 그 말은 언제나 미묘하게 미끄러졌다. 단정 짓기 어려운 순간마다,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못할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그 말을 꺼내 들었다. 애매하다는 것은 어쩌면, 세계의 가장자리 위에 서 있는 일과 닮아 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러나 분명 그 둘 사이 어딘가에 발을 딛고 있는 상태. 선명한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 같은 압박 속에서, 나는 자주 멈추었고, 그 멈춤 속에서 작은 소용돌이를 느꼈다. 그것은 불확실함이라는 이름의 바람이었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스며드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아침, 외출을 준비하며 창문을 연다. 바람은 부드럽게 뺨을 스치고, 햇살은 생각보다 날카롭게 내려앉는다. 외투를 걸쳐야 할지, 아니면 가볍게 나가도 괜찮을지, 그 사소한 선택 앞에서조차 나는 한 발 물러선다. 발걸음은 문턱에서 잠시 멈추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 저울 위에서 조용히 흔들린다. 너무 사소해서 웃음이 날 법한 이 장면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애매함’이라는 이름의 기류를 감지한다. 그것은 결정을 미루는 게으름이 아니라,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에 귀 기울이는 태도에 가깝다.
투표소에 서 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누군가는 확신에 찬 얼굴로 기표소 안으로 들어가고, 누군가는 주저 없이 자신의 선택을 표시한다. 그러나 그 사이 어딘가에는, 마음이 회색으로 물든 사람들이 있다. 찬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걸리고, 반대라고 말하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모자란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에 가깝다.
시험을 앞둔 날에도 비슷한 감정을 겪는다. 합격선이 모호하게 흐려져 있을 때, 어느 지점에 서야 안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마음은 끝없이 흔들린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불안,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데서 오는 긴장. 그것 역시 ‘애매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오래 머문다. 우리는 분명한 기준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 기준이 너무 단단하게 우리를 규정해버릴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애매하다는 것, 혹은 애매한 태도라는 것은 정말로 부정적인 것일까. 우리는 왜 그것을 늘 미완의 상태, 부족한 결단력, 혹은 우유부단함으로만 해석해왔을까. 어쩌면 애매함 역시 하나의 선택일 수 있지 않을까.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확신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단정 지을 수 없는 세계 앞에서, 억지로 색을 칠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묻는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흑이냐, 백이냐. 옳으냐, 그르냐. 좋으냐, 싫으냐. 질문은 언제나 두 갈래로 나뉘어 있고, 우리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처럼 길들여진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간결하지 않다. 모든 감정은 한 가지 색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모든 선택이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은 수많은 중간 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 설명되지 않는 선택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아이에게 던져지는 질문 하나를 떠올린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 질문은 가볍게 던져지지만, 그 안에는 잔인한 이분법이 숨어 있다. 아이의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 둘 다 좋다는 것을. 둘 다 사랑한다는 것을. 그러나 질문은 하나만을 고르라고 요구한다.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춘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닫힌다. 그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어느 하나를 포기할 수 없는 마음,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 애매함 속에는 사랑이 있다. 오히려 분명한 선택보다 더 깊고 넓은 감정이, 그 머뭇거림 속에 담겨 있다.
나는 그런 애매함을 경계했다. 분명하지 않은 태도, 중심 없는 사람, 결정을 미루는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 지었다. 흔들리는 모습이 불편했고, 즉답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답답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불편함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나는 명확함을 통해 안정을 얻고 싶었고, 모든 것을 흑과 백으로 나누어야만 마음이 놓였다. 애매함을 견디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세계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애매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감당해야 할 무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쉽게 결론 내리지 않겠다는 선택, 타인의 입장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겠다는 의지다. 그것은 단호함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빠르게 판단하고 지나가는 대신, 머물러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일. 애매함은 그렇게 시간을 필요로 하는 태도다.
삶은 애초에 애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랑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고, 이별은 언제나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 우정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흔들리고, 성공조차도 온전히 기쁨으로만 남지 않는다. 우리는 늘 그 경계 위를 걷는다. 빛과 그림자 사이, 기쁨과 슬픔 사이, 확신과 의심 사이.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상태로 있다.
어쩌면 애매함은 ‘배려’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입장만을 앞세우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마음. 섣불리 결론을 내려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우리가 우유부단하다고 여겼던 순간들이, 사실은 가장 다정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키려 했던 것들,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남겨두었던 여지들. 그 모든 것들이 애매함이라는 그릇 안에 담겨 있었다.
나는 이제 애매함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인다. 흐릿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색,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분명 느껴지는 감각.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허락한다.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때로는 머뭇거려도 괜찮고, 때로는 결론을 미뤄도 괜찮다.
확신과 단호함 사이에서, 나는 종종 흐릿한 경계를 택한다. 그곳에서는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단정 지어진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결들이, 애매한 빛 속에서는 또렷하게 드러난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고, 관계의 온도도 그렇다. 조금은 애매한 상태에서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애매한 세계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애매함을 견디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의 망설임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일, 말하지 않은 마음을 함부로 비워두지 않는 일. 그 안에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층층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그것이 어쩌면,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고, 햇살은 여전히 따갑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멈춘다. 외투를 걸칠지 말지,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 채. 그러나 이제는 그 망설임이 불편하지 않다. 그 애매한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는 조금 더 오래 서 있는 법을 배운다.
어쩌면 애매함은,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꼭 하나의 답으로만 응답할 필요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분명하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품은 채 문을 연다. 그 문턱 위에서,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하루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