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애매함의 품격

흑과 백 사이 배려와 성숙

by 기록하는최작가

[원문장] <프레임>, 최인철 저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잘 구조화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세상 자체가 애매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경험하고 부딪히는 사건들에 단 하나의 분명한 답만이 존재한다면 프레임도 지혜도 필요 없다.



나는 평소 '애매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명확히 찬반을 가르지 못할 때, 어느 쪽에도 쉽게 기울 수 없을 때, 나는 습관처럼 '애매하다'는 표현을 꺼낸다.
애매하다는 것은 곧 경계에 선다는 뜻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은 채, 선명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 그렇게 명쾌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순간을, 우리는 애매하다고 부른다.

예를 들면 이렇다.
외출 준비를 하며 창문을 열어본다. 바람은 부드럽지만 해는 강하다. 외투를 걸쳐야 할지, 그냥 나가도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또는 투표를 해야 할 때, 찬성도 반대도 아닌 회색지대에 머무는 사람들을 본다. 한쪽을 택하기엔 뭔가 찝찝하고, 그렇다고 반대할 만큼 확고한 신념도 없다.
시험장에서는 합격 기준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어느 정도 점수를 받아야 안심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평가를 기다리며 느끼는 그 불투명한 긴장감 또한 '애매함'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매하다'는 것, 혹은 '애매한 태도'란 정말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아니, 오히려 애매함은 하나의 '선택' 아닐까? 분명한 의사 표현이 아닐까?

세상은 끊임없이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
흑이냐 백이냐, 옳으냐 그르냐, 좋으냐 싫으냐.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든 선택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감정도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애매함을 택한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확신할 수 없는 다층적인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이에게 던지는 이 질문처럼 잔인한 것이 있을까.
아이는 둘 다 좋아한다. 정말로 둘 다 좋아한다. 하지만 질문은 하나만을 고르라고 강요한다. 그럴 때 아이는 대답을 머뭇거린다. 둘 다 좋다고 말하거나, 아예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과 머뭇거림은 단순한 줏대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둘 다 상처주고 싶지 않은 마음, 둘 다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애매함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배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입장만을 관철하기보다, 모든 상황과 사람을 고려하는 섬세한 마음. 섣불리 결론을 내려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태도.
어쩌면 우리가 '애매하다'고 비판했던 많은 순간들은, 단호하지 못함이 아니라 다정함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애매함을 가볍게 취급했다.
확실하지 못한 사람, 중심이 없는 사람이라 단정지었다. 흔들리는 모습이 못마땅했고,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 그들이 불편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판단은 온전히 나의 프레임이었다.
흑과 백을 나누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나의 조급함, 애매함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미성숙이 만든 렌즈였다.
삶은 본래 애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랑도, 이별도, 우정도, 성공도, 심지어 옳고 그름조차도. 모든 것은 명확하지 않기에 깊고, 명확하지 않기에 아름답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애매한 세계를 살아간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쉽게 단정짓지 않고, 모호함 속에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아닐까.
이제는 누군가가 애매한 태도를 보일 때,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생각, 수많은 배려, 그리고 수많은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숨어 있을 테니까.

나는 이제 애매함을 경계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존중하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에 즉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허락한다.
확신과 단호함 사이에서, 때로는 모호하고 흐릿한 경계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더 넓은 이해를 만들어주고, 더 깊은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