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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장의 철학

입을 옷은 많지만, 나를 입는 법은 어렵다

by 기록하는최작가

[원문장] <프레임>, 최인철 저

출근할 때마다 직장인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오늘은 또 뭘 입고 나가지?’이다. 옷장 안에는 옷들로 꽉 차 있지만 막상 입고 나갈 옷이 없어서 난감하다. 연이어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면 사람들이 금방 알아볼 것이라는 생각에 새 옷을 사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옷장에 옷이 가득해도 아침이면 또다시 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출근길 아침, 나는 옷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전투복이라는 정해진 유니폼이 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다는 사실은 단조로울 수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나에겐 일상의 큰 위로가 된다.
무엇을 입을지, 어떻게 보일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작고 소소한 결정이 줄어들 때, 삶은 오히려 단순해지고 평화로워진다.
부대에 들어서면 나뿐 아니라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얼굴,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우리는 전투복이라는 공통의 언어 속에서 익숙해진다.
다름은 지워지고, 오직 '함께'라는 감각만이 또렷해진다.

그런데 주말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면, 갑자기 옷이 신경 쓰인다.
오랜만에 일상복을 입는 자리, 옷장 앞에 선 나는 문득 당황한다.
분명히 옷은 많은데, 입고 싶은 옷은 없다.
어느새 옷장은 마치 미로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고르든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무엇을 입든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오랜 시간 입지 않은 옷들도 많다.
다음에 입어야지, 다음 기회에 꺼내야지 하며 미뤄둔 옷들. 하지만 그 ‘다음’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 옷들 사이로 마음을 숨겨왔는지도 모른다.
입지 않는 옷은, 사실 입지 않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옷이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내 옷장은 대부분 검은색으로 가득 차 있다.
처음부터 검은 옷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옷을 고르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검은색은 어디에 가도 무난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간편복도, 트레이닝복도, 격식 있는 자리의 옷도
하나둘 검은색으로 통일되어갔다.
그러나 그마저도 ‘프레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검은색이 안전하다는 믿음, 무난하게 보이기 위한 선택조차 어쩌면 또 하나의 자의식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사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옷을 입는지,
어떤 색을 선택했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가장 예민하게 나의 모습을 의식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뿐이다.

물론 옷이라는 것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너무 흐트러진 모습은 나를 낮춰 보이게 만들고,
타인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단정함은 예의이고, 절제는 태도다.
하지만 브랜드, 가격, 유행, 색깔 같은 요소들에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쏟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결국, '어떻게 입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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