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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fton Parker Feb 19. 2024

2. 갑작스러운 행운, 2년간 미국살이

November 2020 ~April 2021

(커버 이미지 : 한국에서 쓰던 것들을 미국으로 보내는 이삿날, 나는 먼저 떠나고 아내가 혼자 이사를 했다.)


평범한 40대 중반 김 부장의 안정된 삶

 

우리는 서울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던 가족이었다.

40대 아저씨 직장인인 나, 맞벌이 직장인 아내, 초등학교 3학년 하나뿐인 딸 세은이 이렇게 셋이다.

회사도 결혼생활도 충분히 오래되어 익숙해지고, 다행히도 누구 아픈 일도 없이 무탈하게 살고 있었다.

회사는 업계에서 비교적 평판이 좋은 회사고 해외 지사도 운영할 정도로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곳이다.


그동안 아내와 함께 열심히 벌고 모아서, 우리는 부유한 것까지는 아니어도 부족하지 않게 살아왔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을 벗어나 안정적이고 싶어서 최대한 열심히 살았다.

뭔가 모자라도 그저 만족하며 살았고 아내의 노력이 더해져서 우리는 빠르게 안정된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안정의 시간이 오래되면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어릴 때 가졌던 목표들은 이미 다 이루었거나 더 이상 이룰 수 없게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회사를 가고, 매일 같은 일을 하고,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고, 돈을 벌고, 대출을 갚고...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더 이상 새로운 도전 같은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궁금한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불혹(不惑)의 나이 40대.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는 나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내가 현명해졌거나 부유하다는 뜻이 아니고, 호기심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기에 충분했다.

발전하는 인생을 꿈꾸기보다 자발적 정체를 추구하고 있었다. '굳이 그런 게 나한테 필요한가?'

우리는 휴가를 가도 매년 같은 장소, 심지어 같은 숙소와 같은 식당으로만 갈 정도였다.

내가 최적화해 놓은 일상은 굉장한 고효율이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었다.

퇴근 후 밤에 세은이를 재우고 나서 아내와 단 둘이 있을 때도 우리는 나눌 얘기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으니까.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의 반복이었다.

 

미국으로 가야 한다고?

 

그런 내가 미국으로 가야 한다고 회사에서 통보받은 것은 발령 6개월 전인 2020년 11월이었다.

회사는 미국 뉴욕 주 말타 (Malta, NY)라는 곳에 기술 영업을 위한 고객사와의 공동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한국 본사 여러 부서직원들을 한 해에 8명씩 선발하여 보내고 있다.

한번 가면 2년간 미국에서 지내면서 파트너 직원 신분으로 고객사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총 16명의 한국 직원들이 함께 일하게 된다.


파견지가 다른 곳도 아니고 미국 뉴욕이라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뉴욕시티는 아니지만..)

우리 랩은 작은 규모의 팀이어서 다른 부서처럼 매년 사람을 보내지 못하고 2년에 한 명만 보낼 수 있게 할당되었기 때문에 부서 내 경쟁이 특히 심했었다.

그런데 우선순위 후보자들의 여러 상황이 맞물리면서 상대적 후순위였던 나한테까지 기회가 와서 선발까지 됐다.

동료들과 경쟁하는 게 싫어서 평소에 특별히 티 내지 않았던 나로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회사의 파견자 지원 혜택은 상당히 괜찮은 수준데, 비자 및 이사에 대한 제반 비용 모두를 회사가 부담하고 가족을 동반하는 것도 가능했다.

2년간 가족생활 수당과 주택 임대 및 의료보험도 지원되는데, 아무래도 타지에서 외롭게 생활해야 하니까 최소한 금전적으로는 부족하지 않은 지원을 주는 듯했다.

회사의 혜택을 다 계산해 보면 적어도 먹고사는 것을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 살던 대로만 살면 말이지...

 

뉴욕 주와 뉴욕시티, 그리고 40대 아저씨에게 미국이란?

 

랩장님의 합격 통보(?) 면담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와서는 일단 지도부터 살펴봤다.

미국 동북부에 있는 뉴욕 (NYS, New York State)는 우리나라 보다 면적이 약간 큰데, 내가 가게 된 말타(Malta) 뉴욕 주의 북쪽(Upstate, Capital Region)있는 작은 도시이다.

"뉴욕"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뉴욕시티(NYC, New York City)에서 서너 시간은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곳이다.

말타 주변 가장 큰 도시는 주 청사와 공항이 있는 알바니(Albany)이고 말타는 알바니에서 35분 정도 북쪽에 있는 교외(Suburbs) 지역이었다.

교외지역,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당이 넓은 목조 집들이 숲 사이에 띄엄띄엄 있고 어딜 가든 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지금껏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미국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분위기의 동네다.


'휴...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야 하는 거구나.'


어린 시절엔 미국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꽤나 있었다.

아주 어릴 때는 AFKN(주한미군방송, 그 시절엔 공중파 안테나로 누구나 시청이 가능했었다.)에서 프로레슬링이나 미국 예능방송도 보면서 자랐고, 조금 커서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나 "음악도시" 같은 라디오에 나오는 팝송을 찾아들었던 기억도 있다.

대학 다니면서는 미국인 강사가 있는 영어회화 학원도 다니고, 록 음악을 좋아해서 RATM이나 마릴린 맨슨 같은 미국 록 밴드의 CD도 종종 사서 듣곤 했었다.

하지만 집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라서 유학이나 어학연수 같은 건 생각조차 볼 수도 없었다. 

미국에 대해 아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들어봤고 막연하게 가보면 좋겠다 싶은 곳이 몇 군데 있던 정도가 나의 미국에 대한 지식수준이었다. 

아마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이 많이들 그렇지 않았을까?


낮에 통화할 때는 깜짝 놀라 했던 아내에게는 퇴근해서 랩장과의 면담 내용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내는 처음엔 매우 놀랐지만 이내 곧 설렘 가득한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사실 아내도 나와 비슷한 수준의 미국 지식을 갖고 있는 보통의 한국인이기 때문에, 미국, 특히 뉴욕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한적한 단독 주택에 살면서 자전거 타고 다니고, 뉴욕 시내 어느 길가에서 우아하게 베이글과 커피를 먹는 꿈(?)을 이루고 싶다고 했다. '이런 소박한 아줌마 같으니라고.'


세계의 중심 미국, 그 미국 안에서도 뉴욕에서 2년간 살게 되다니… 

지금 한국에서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편안하고 안정적이기만 해서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뭔가 새롭게 도전할 것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회사의 발령을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미국 비자 준비

 

우선 세은이에게 설명을 해야 했다.

지금 만나는 친구들과 2년간 헤어지고, 말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해줘야 했다.

세은이는 영어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고 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알파벳 정도를 배웠을 뿐이라서, 지금부터라도 빨리 학원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상황을 받아들이게 해야 했다.

다음날 우리가 세은이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세은이는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비록 9살짜리 아이지만 미국과 뉴욕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다행히 영어 학원은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아서 빼먹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고작 몇 달 다닌 걸로 달라질 건 없겠지만, 알파벳이라도 잘 쓰고 읽는 정도만 되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준비 과정에서 세은이가 모든 것을 이해해 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지내 주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국 이민 준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자였는데, 내가 받아야 했던 주재원 비자(나는 L1, 가족은 L2)

 - 한국과 미국 양쪽에 사업장을 가진 회사가

 - 한국에 있는 “뛰어난” 직원을 미국으로 보내서

 - 미국의 경제에 이바지하는 업무를 하는 경우에 받을 수 있는 입국 허가 등급이다.

그래서 비자 서류는 내가 매우 뛰어나며 미국 경제에 꼭 필요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부끄럽고 민망한 것이어야 했다.

회사는 미국 변호사를 고용해서 비자 업무를 돕도록 해 주었지만, 서류를 떼야하는 것도, 번역을 해야 하는 것도, 열 페이지가 넘는 접수 서류도 작성하는 것도 직접 내가 해야만 해서 엄청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길고 힘들던 서류준비가 다 끝나고 인터뷰 온라인 예약도 마치고, 미국 변호사가 DHL로 보낸 최종 서류를 받고 나서 모든 준비가 마쳤다.

비자 인터뷰 날짜는 파견을 떠나기 2주쯤 전이었는데, 가족 모두가 광화문에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했는데 생각보다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사관 입구에서 예약 내역을 확인하고 가방 검색을 하고 2층에 올라갔더니 20명 남짓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순서가 되어 접수원에게 수수료를 지불하고, 바로 옆칸에 있는 영사에게 갔더니, 내가 준비한 서류를 넘겨 보면서 회사 업무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근데 물어보는 내용들은 내가 하는 일을 자세히 알고 싶어 한다기보다는 맡은 업무에 확신이 있는가 하는 태도를 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비자 서류에 적어 놓은 대로 "너무 뛰어나서 미국 경제에 이바지하러 가는"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자신감 있게 대답했더니 아내와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에게 "Have a nice trip"를 날려주었다. 


영사가 서류(I-129S)에 도장을 찍고 비자는 승인되었다. 우리는 미국으로 간다.


인터뷰가 끝나고 며칠 뒤 비자가 부착된 여권을 택배로 받았다. 이제 정말 간다.


(왼쪽) 비자 인터뷰 통과 후 마침내 긴장이 사라진 세은이. (오른쪽)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세은이의 마지막 소원, "노량진 대게"


미국에서 살기 위한 준비 : 파견 동기들, 이사 준비

 

이번에 함께 파견 가는 동기들은 큰 부서 두 군데서 각 3명씩, 한 명은 작은 부서에서 혼자, 나까지 총 8명.

나는 아무하고도 친분이 없었는데, 다른 분들은 큰 부서에서 오신 분들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인연으로 서로 이미 알고 지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서먹했지만 준비과정 중에 자주 연락하고 도움을 주고받다 보니 점점 친해지게 되었다.

다들 나처럼, 어학연수조차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고 있었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에 심리적으로 편안했다.

또 다행히 세은이와 동갑인 여자 애들이 셋이나 있어서, 미국에서의 미래를 생각하면 친하게 지내야만 했다.

아직 미국엔 가지도 않았지만 서로 돕고 의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큰 위안이 되었다.


비자나 학교 일 같은 공식적인 것들은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정보도 자세하고 일관적인 데다가 회사에서도 충분히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준비하면서 어렵게 느껴졌던 것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떤 집을 어떻게 구하는지, 전기/가스/수도 등 서비스 사용 방법, 학교나 직장 문화 등등의 일상생활이 쉽사리 예상되지 않고 찾아볼 만한 곳도 없었다.

미국 이민 카페나 블로그 정보들은 작성 시점과 거주 장소에 따라 내용이 천차만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뉴욕 주 북쪽엔 한국인들이 많이 살지 않아서인지 생활환경을 알만한 글을 찾기 어려웠다.

그저 막연히 상상하는 미국 생활 모습에 맞춰 짐을 싸고 추가로 필요한 건 가서 준비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왼쪽) 이사 날 풍경. 전문 이사라서 그런지 지금껏 받았던 이사 서비스 중에서 가장 프로페셔널 했다. (오른쪽) 텅 빈 우리집


회사에서 파견 가는 날을 2021년 5월 1일로 정해줬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이사 일정도 정해야 했는데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했던 건 세은이 학교일정이었다.

뉴욕 주는 학기가 9월에 시작하니까, 세은이가 한국에서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서 미국에 4학년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2년 뒤 한국에 돌아와서 복학할 때 수강 학기 계산이 애매해지지 않게 되어 나중이 편해진다.

그래서 회사에서 정해준 일정대로 나 혼자 5월에 먼저 가서 정착 준비를 하고, 아내와 세은이는 내가 떠난 뒤 한국에서 이사를 하고 1학기를 마친 7월에 미국으로 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내가 미국에서 해야 할 일은 집, 자동차, 학교 전학 준비 등이고 아내는 세은이의 한국 학교의 마무리와 해외 이사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회사에서는 5월 한 달간, 도착해서 집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미국 사무실 주변 호텔을 예약해 주었는데, 호텔 숙박 기간 동안 어떻게든 집을 빨리 구해야 했다.


내가 5월 1일에 떠나고 나서 아내 혼자 이사를 해야 하니까, 꼼꼼하게 잘해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회사가 돈 많이 주고 보내준 업체니까 별일 없겠지? (실제로 이사는 아주 잘 되었고 아내도 매우 흡족해했다.)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삿짐을 보내면, 컨테이너에 실리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파나마 운하를 지나서, 대서양 북쪽 뉴욕항까지 온 뒤 트럭을 타고 집으로 배송된다.

이 모든 과정이 보통 2~3달 정도 걸리는데, 항구 선적 일정 때문에 정확한 날짜는 보장하지 못한단다.

우리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면 한국의 집은 일산 사는 처형네 식구가 와서 살기로 했기 때문에 급하게 임차인을 구할 필요 없어서 복잡한 처리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떠나기 직전엔 양가 부모님을 찾아가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아내와 세은이를 뒤로 한 채 인천공항, 그리고 미국 뉴욕 주 알바니 공항으로 떠나는 2년짜리 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2년 뒤 돌아올 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Fondly,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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