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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fton Parker Feb 25. 2024

3. 마침내 뉴욕에 도착하다. (Upstate NY)

May 2021

(커버 이미지 :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부근. 미국 도착 첫날 비행기에서 촬영)


Welcome to the US

 

미국에서 2년, 드디어 그 대장정을 시작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인천에서 출발해서 조지아 주 애틀랜타(Atlanta, GA)에서 입국 심사를 한 뒤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최종 목적지인 뉴욕 주 알바니(Albany, NY)로 가는 일정이다.

새벽에 집을 떠나며 아내와 세은이랑 인사하고, 인천공항 로비에선 주재원 동기들을 만났다.

중고 시장에서 급하게 구한, 평생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아주 큰 캐리어와 이민가방 두어 개를 항공사 카운터에 부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긴 시간 동안 불편한 이코노미석을 참아내고,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섰을 때 비로소 미국에 도착했음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긴 복도의 한편엔 “Welcome to the US”라고 쓰여 있기는 했지만, 상당히 경직된 분위기인 입국장에서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오기 전에 찾아봤던 수많은 입국 경험담 대로 미국 공항 입국장은 외국인에게 친절하지도 않고 우호적이지도 않은 느낌이다.

반가움이나 환영보다는, 잘 못 한 것 없는데도 괜히 주눅 드는 느낌, 언제든 누구든 바로 쫓아낼 수 있는 분위기. 그게 미국 공항의 첫 모습이었다.

긴 줄에 서서 1시간 남짓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순서가 왔고, 입국 심사관은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다행히도 미리 예상했던 질문들이라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미국에 온 것이 처음인지, 어느 지역,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현금은 얼마나 가지고 왔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가져간 서류를 보여주면서 준비했던 대로 대답하고 나서 다행히 문제없이 입국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덤덤한 척 빠져나왔지만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먼저 나와 있던 동기들이 환영해 주었다.


2시간 정도 애틀랜타 공항에서 대기한 뒤, 알바니로 가는 국내선을 탔고 3시간 걸려서 늦은 밤 시간에 숙소로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에 체크인했을 땐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에 간단히 씻고 잠을 자야 했다.

세은이와 아내, 부모님께 도착 인사를 하고 나서 침대에 누웠지만, 내일부터 곧바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내 인생에서 굉장히 기념할만한 순간이 그렇게 어느 호텔 침대 위에서 정신없게 지나가고 있었다.

 

알바니(Albany) 주변 일상 탐방

 

다음날부터 주변을 탐험(?)하고 먹고사는 생활이 가능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리의 숙소는, 사무실이 있는 말타(Malta NY)에서 조금 떨어진 알바니(Albnay NY)의 “크로스게이츠 몰(Crossgates mall)”이라는 대형 쇼핑몰 바로 앞에 있었다. 

숙소가 말타 주변이 아니고 알바니로 정해진 이유는 알바니가 뉴욕 주 주도(州都, State Capital)라서 큰 도시니까 각종 편의시설이 가까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설마 회사는 아무 생각 없이 정했는데, 내가 지금 꿈보다 해몽인 건가?' 아무튼 호텔도 크고 좋은 편이었다. 

크로스게이츠 몰은 뉴욕 주 전체에서 손에 꼽는 대형 쇼핑센터라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구할 수 있다.

미국 월마트(Walmart) 매장 중에서 가장 큰 매장이 바로 여기에 있고, 통신사(Verizon)와 전자제품(Best Buy) 매장도 있어서 핸드폰 개통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일 처음 한 일은 핸드폰 개통인데, 왜냐면 핸드폰은 모든 사회 활동의 시작이고 전화번호가 없으면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렇다.

2년간 미국에서 살아야 하는데 한국 번호를 로밍해서 쓸 수는 없고 현지 번호가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도 해외 번호로 전화나 문자가 오면 사람들이 안 받지 않았던가. 여기도 마찬가지다.

통신사 매장에 가보니 사용 요금은 한국에서 쓰던 것과 큰 차이는 없고, SSN(Social Security Number,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유사한 미국 사회 보장 번호) 없는 우리 같은 외국인은 선불제만 가입할 수 있다고 했다.

여권과 신용카드 정보만 알려주면 USIM 사서 개통 하는 건 즉시 가능해서 특별히 어려움은 없었다.

사용하면서 보니, 상당수 미국 앱이 한국 구글 계정으로는 설치가 안되기 때문에 미국 전화번호로 미국 구글 계정 하나를 새로 만들어 추가해서 해결했다.

이렇게 첫 미션, 전화번호 만들기는 아주 Easy!


숙소에서 30분 거리 안에 작은 규모의 한인 식료품 매장이 무려 두 군데나 있었다. 

작은 가게라고 해도 있어야 할 건 다 있는데, 이 작은 마트들이 없다면 3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한인마트로 가야 했기 때문에 무척 소중한 곳이다.

이곳은 한국 식자재나 물건뿐만 아니라 간단한 반찬도 직접 만들어 팔고,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부동산이나 병원, 교회 등의 정보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알바니 주변에 한인 마트가 두 군데나 있는 걸로 보아, 한국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가격은 당연히 비싸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한국 가격과 엄청나게 차이 나지 않아서 더욱 반가웠다.

 

(왼쪽) 미국 내 최대 면적 월마트 매장인 크로스게이츠 지점, (가운데) 슈퍼마켓 수준의 한인 마트 "장터", (오른쪽) 또 다른 한인 마트 "킴스"


주재원 동기들과 호텔 생활 하면서 마트, 주유소, 약국 등 일상 장소들을 틈날 때마다 몰려다녔다.

한국에선 익숙한 일상의 일들을 이곳에서 새로 배워야 했다. 어떤 것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사고받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들을 주고받는지 익숙해져야만 했다.

초반에 많이 당황했던 것 중 하나는 신용카드 결제할 때 가게 점원이 본인 확인 목적으로 우편번호 (Zip code)를 물어보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서 여러 번 되묻기도 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편번호는 당연히 거주하는 곳의 우편 번호인데 여행자가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우편번호는 통하지 않는데, 한국 카드 회사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 "해외결재용 우편번호"를 미리 입력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나는 호텔 주소의 우편번호를 한국 카드사 홈페이지에 입력하고 사용했다.)

환경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적립 카드 있으세요?", "영수증 드릴까요?", "봉투에 담아드려요?" 이런 익숙한 대화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자주 맞닥뜨려서 익숙해지는 수밖에는 없다.

 

미국 직장의 모습 : 지금은 코비드 시대, 모두가 재택근무 중


나는 뉴욕 주 말타에 있는 고객사의 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나를 포함한 한국 주재원들은 고객사 연구원들과 한 팀을 이루어 신제품 연구를 하는 프로젝트를 구성한다.

주재원들 마다 파트너로 배정된 고객사 연구원들이 있고, 고객사 매니저에게 업무지시를 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 주재원들끼리 업무를 같이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사실 각자 역할이 다른 부서에서 선발된 주재원들이라 업무적 교집합이 없으니 주재원들끼리 일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간혹 주재원 두 명 정도는 같은 파트에 속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나는 파트너 직원하고만 짝을 이루게 되었다.

주재원들의 근태 감독이나 최종 업무 평가를 하는 우리 회사 상주 관리자가 한 명 있는데, 말타 현지에서 우리 회사가 고용한 Jason이다.

Jason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한국말하는 한국 사람인데 30대 후반에 이민 와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고 했고 한국에서 우리 회사를 다닌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여기 올 수 있게 되었나 보다.

평상시 업무는 미국 파트너 연구원들과 영어로(당연히) 하고 한국 주재원들끼리는 Jason과 한국어로(이 또한 당연히) 따로 보고해야 했다. 한국 본사 하고도 한 달에 한번 정도 온라인 미팅을 했다.


주재원으로 막 부임했을 때 연구소 사무실은 뉴욕 주의 코비드(COVID-19, 한국명 코로나 바이러스) 집합금지 명령에 의해 오랜 시간 폐쇄되어 있었고 여전히 출근은 금지되어 있았다.

모든 업무가 줌(Zoom, 온라인 화상 미팅 서비스)과 이메일, 메신저로 진행되고 있어서 신규 주재원들은 일과 시간엔 각자의 호텔방에서 줌 미팅으로 Jason이나 다른 동료들을 만나곤 했다.

대부분의 고객사 파트너들은 멀지 않은 곳에 살지만 몇몇은 몇 시간씩 걸리는 버몬트나 델라웨어 같은 다른 주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3시간 시차가 있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사람도 있었다. (캘리포니아 파트너를 만나려면 무조건 늦은 오후에 해야 했다. 그래서 이 친구랑 금요일에 보는 건 절대 안 하고 싶었다.)

프라이버시 때문인지 카메라를 켜지 않은 채로 미팅을 하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해도 새 업무 적응이 될까 말까 인데 얼굴도 안 보이는 화상 미팅, 그것도 영어로 하려니 미팅에서 뭘 말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좀 답답했다.


어느 주재원 선배의 귀환 그리고 내가 이루고 싶은 것


새로운 직장, 새로운 지역에 적응하기 위해 한국 선임자들을 최우선으로 만나 보고 싶었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회사가 코비드로 전면 재택근무 중인 상황에서 누굴 만났다가 코비드라도 걸리게 되면 Jason에게 변명을 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라서, 날 좀 만나달라고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또 아무리 내가 급하다고 해서 선임자 중에 나랑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뜬금없이 밖에서 혹은 집에 초대해서 날 좀 만나달라고 하는 건 좀 예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주재원 전체 단톡방에 오가는 대화를 보고 있으면 사람들은 코비드 시절을 보내면서 "아무나 하고는 만나지 않는 생활"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비드 상황이니 공공연히 누굴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분위기상, 정황상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동기 중 몇몇은 친분이 있는 선임자와 가끔 만나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에 비해 나는 아무 연관 없이 혼자 왔기 때문에 호텔에 함께 있는 동기들 말고는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누굴 만나는 건 오로지 나의 필요이다. 정착을 해야 하는 내 상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거지 상대방은 원하는 것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다.

입장 바꿔 냉정히 말하면 사실 나는 굳이 만날 필요 없는 "아무나"이다.

이곳에 이미 정착한 사람들 입장에선 코비드 감염 걱정이 될 뿐만이 아니라 더 이상 새로운 관계를 원하지도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새로 부임한 사람과의 만남이라는 것은, 새로 온 사람은 부탁만 하고 선임자들은 도움을 주기만 해야 하는 것일 테니까 선임자들이 "아무나"와의 만남에 적극적이지 않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쉬쉬하며 선임자를 몰래 만나는 동기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게, 혼자 가서 만나고 오는 것도 눈치 보이는 데 굳이 "아무나"를 달고 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사실 여기가 스무 명도 안 되는 작은 한국인 그룹이니 모두가 서로 의지하고 도움 주고받고 살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조금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다들 각자의 입장에서 잘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이리된 것이니 내가 이 상황을 서운해하거나 원망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조금 씁쓸할 뿐. 

외로워하거나 서운함에 매몰되기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밝은 모습으로 선임자들과 동기들을 대해서 없는 친분을 쌓아가야 한다. 아직 정착 작업은 시작도 안 한 것 아닌가.

그렇게 내가 잘해서 살아남는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나와 친분이 없을 뿐이지 악한 마음으로 누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시간이 좀 필요하다. 잘하면 될 거다.

보통의 이민자들이 아마 그렇게 해왔을 테니, 나 역시 그런 길을 가야 하는 거겠지.


호텔방에서 일하는 게 조금씩 익숙해질 때쯤, 한국으로 돌아가는 선임자들의 온라인 환송식이 있었다.

코비드가 아니면 다 같이 만나서 식사도 했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각자의 방에서 인사를 해야 했다.

떠나는 분들은 각자 한 두 장씩 ppt 자료를 만들어서 지난 2년간의 미국에서 있었던 추억을 공유해 주었다.

많은 분들이 가족 여행 갔던 이야기와 골프 쳤던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딱 한 명, 동네 이웃과의 송별회 사진을 보여주면서 떠나기 아쉽다고 얘기해 주신 분이 있었다.

동네 이웃들과 평소에 어울려 지내왔는데 며칠 전 집에 초대해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작별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발표를 듣는 순간, 여행을 많이 가거나 골프를 잘 치게 되는 것보다는 이런 모습이 내가 정말 이루고 싶은 모습이고 굉장히 부럽고 가치 있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2년짜리 여행자가 아니라 온전한 이웃으로 뒤섞여서 현지 사람으로 사는 것.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정착.

두 달 뒤 도착할 우리 가족과 미국에서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아직은 잘 몰라도 2년 뒤 한국으로 되돌아가게 될 때 저런 모습으로 갈 수 있게 되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지금은 집도 없이 호텔방을 전전하고 있지만... 하나씩 만들어 가자.


호텔 생활과 파견 동기들


여행으로 호텔에 와 있는 게 아니라서 호텔 살이는 마음이 굉장히 불안정하다.

회사가 구해준 호텔방이 크고 좋은 것이라 무척 고마운 일이지만, 놀러 온 게 아니고 집이 없어서 임시로 있는 것이라서 때때로 마음이 조급해지고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 혼자 버려진 게 아니고 동기들과 같이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된다. 

각자 잘하는 게 있어서 해야 할 일도 나눌 수 있었는데, 누군가는 구글링을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곳에 가보고 누군가는 식사 준비를 하는 등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엔 다 같이 모여서 맥주 한잔 마시면서 그 결과를 대가 없이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명이 일을 나누어 할 수 있는 건 참 다행스러운 상황이었다.


주말엔 다 같이 차에 나눠 타고 나들이 갈 때도 있었다. 마치 가족들이 왔을 때를 대비하는 연습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 뉴욕 주립공원,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배경이 되었던 조지 호수(Lake George), 미국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이 있는 쿠퍼스타운(Coopers Town)등 동기들과 같이 갔던 곳들은 나중에 꼭 가족이랑 오고 싶은 곳이었다.


(왼쪽) 조지 호수와 유람선, (중앙) 사라토가 주립공원 안에 있는 Geyser Creek, (오른쪽) 쿠퍼스타운의 페니모어 미술관. 키스 헤링의 전시가 있었다.


합숙 같은 호텔 생활로 동기들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기 때문에, 한 달 여 뒤부터 각자의 가족들이 미국에 오게 되면 서로 집으로 초대해서 더욱 가까이 지내기로 약속했다.

기댈 곳 없는 이곳에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지내고 싶어 했다. 아이들도 있으니.

집을 구해서 호텔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컸지만, 그렇게 되면 동기들과의 합숙 생활을 떠나야 하는 거라서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서둘러 집을 찾아야 했다. 


집을 구하는 것이야 말로 미국 이민 생활의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Fondly,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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