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022
(커버 이미지 : 학교 수업시간에 여행기를 발표하고 있는 세은이. Mrs. Miller가 발표기회를 주고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었다.)
지난 학부모 면담 때 Mrs. Miller는 반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여행을 가게 되면 사진 몇 장을 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다. (참고 : 미국 초등학교 학부모 상담)
그런데 막상 여행을 다녀와 보니, 사진을 고르는데 고민이 되었다.
'사진만 보내면 세은이가 직접 설명할 수 없으니 뭐가 뭔지 모를 텐데. 설명을 좀 써줘야 할까? 아... 그럼 차라리 설명을 적어서 PPT로 보내주면 되겠네.'
우리 가족 여행사진을 관리하던 방법
여행을 다녀오면 보통은 수백 장의 사진이 쌓이곤 한다. 하지만 그걸 다시 꺼내 보는 일은 거의 없다. 사진이 너무 많으니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너무 많이 찍는 건 아예 안 찍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예쁘게 찍어 놓은 사진들이 버려지는 것도 아깝고, 여행에서 사진 찍느라 시간 쓴 것도 아깝게 된다.
나는 늘 궁금했다. '보지 않을 사진을 뭐 하러 찍나? 그리고 사진 잘 찍어서 왜 처박아 두나?'
그래서 세은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사진은 주로 아내가 찍고 나는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구글 포토를 사용해서 사진을 정리했는데, 일단 파트너 계정으로 서로를 연결하면 아내가 찍은 사진이 내 계정에 거의 실시간으로 똑같이 미러링 되기 때문에 백업받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구글 포토엔 '앨범' 기능이 있어서 사진과 함께 이동 경로, 방문 위치, 날짜, 각종 메모 같은 것을 기록할 수 있다. 나중에 어디를 어떻게 다녀왔는지 찾아보기 편리하다. 사진 원본을 다운로드하기도 편하게 되어있다.
정리가 끝나면 앨범 URL로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양가 부모님이나 세은이랑 같이 어울렸던 친구 엄마들에게 사진을 공유해 주기 아주 유용하다.
여행을 다녀오면 그때마다 수백 장의 사진을 수십 장으로 추리고, 경로를 표시하고, 메모를 적어서 앨범으로 만드는 것까지 보통 한나절 정도 걸리곤 한다. 해 놓으면 뿌듯하다.
나는 평소에 이런 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학교에 사진 몇 장 보내는 건 어렵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앨범으로 정리해 놓은 것도 사진이 수십 장이라 PPT로 만들기에도 너무 많다. 결국 앨범에서도 한번 더 골라서 10~20장 수준으로 정리되어야 PPT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무작정 만들면 PPT 분량 조절이 안될 것 같으니 어떻게 만들지 미리 생각을 좀 해봐야 한다.
학교로 보내는 가족 여행 PPT
여행 PPT를 만들기 전에 나름의 편집 규칙을 정했다.
영어와 한글을 모두 적을 것. 그래야 세은이와 반 친구들이 다 같이 읽을 수 있다.
여행 중에 세은이가 했던, 했을 법한 표현을 주로 쓸 것. 아이가 말하는 느낌이 나도록.
자료를 따라 직접 여행을 갈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작성한다. 우리 자료를 보고 반 아이중 누군가 같은 여행을 다녀온다면 그것 또한 재밌는 얘기 거리가 될 수 있으니.
하루의 이야기가 한 페이지를 넘지 않도록 한다. 그렇지만 사진이 너무 많거나/작거나 글이 너무 많지 않도록 조심하자. 너무 많으면 사람들이 아예 보지 않는다.
첫 페이지는 전체 여행 경로 설명으로 시작하고 마지막 페이지는 가장 인상적인 단 한 장의 사진을 넣자.
완성이 되면 세은이에게 꼭 최종 확인을 받고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 가서 당황하지 않게.
페이지마다 대여섯 장의 사진, 짧은 설명 그리고 세은이가 했던 말들을 적어 넣고 나니 얼추 볼만한 것 같다.
아빠인 내가 어른의 지식으로 알려 주고 싶은 말들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재미없다. 이건 세은이의 여행기니까.
다 해놓고 보니 이 정도면 우리가 주말, 휴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선생님이나 반 친구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PPT 여행기의 첫 시도로, Orlando(참고 : Orlando 여행기)를 다녀온 후 며칠간 끙끙대면서 PPT를 작성했고 세은이의 컨펌을 받은 뒤, Mrs. Miller와 ENL 선생님 Mr. Sweet에게 메일로 보냈다.
지난 PTC에 Mrs. Miller께서 여행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세은이가 영어를 잘 못해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어려우니 사진만 보내드려서는 저희의 여행을 이해하시기에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다녀온 저희 여행 이야기를 PPT에 사진과 설명을 넣어 보내드립니다.
세은이가 미국에서 보고 경험했던 것들을 이해하고 함께 즐겨주시면 좋겠고, 학교에서도 좋은 대화 주제로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라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Mrs. Miller가 보내달라 말했으니 그 말만 믿고 일단 보낸다. 빈 말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라도 해본다. 세은이는 미국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니까.
자료 만드느라 시간, 노력 쓴 건 상관없다. 학교에서 이걸 기분 좋게 받아주기만 한다면 좋겠는데. 학교에서 부담스럽다고 하면 뭐 그냥... 아쉽지만 우리 가족 역사의 기록물이 되어 하드디스크에 남으면 된다.
우리 가족 여행 PPT에 대한 미국 초등학교의 반응
메일을 보낸 다음날 아침 수업 시작 전에 Mrs. Miller에게서 고맙다는 짧은 답장이 왔다. 올랜도는 아이들이 굉장히 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며 다른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날 학교 끝나고 돌아온 세은이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학교에서 자료 봤니? 어땠어? 어떻게 봤어?" 물어보았다.
그냥 다 같이 봤다고만 얘기한다. 뭐가 부끄러운 건지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세은이는 원래 학교 얘기를 잘해주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번은 좀 답답하다.
'아... 정말 이 어린이... 되게 비협조적이네. 이거 하느라 며칠씩이나 쓴 건데...'
그런데 며칠 뒤 Mrs. Miller는 다시 메일을 보내서 사진 몇 장을 보내주었다. 수업시간에 세은이가 친구들에게 여행기를 발표하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수업시간에 따로 시간을 내서 세은이가 친구들 앞에서 여행기를 발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고 했다.
세은이처럼, 이렇게 멀리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여행을 갈 수 있는 미국 아이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세은이가 이번에 다녀온 올랜도는 미국 아이들이 정말 가고 싶어 하는 장소입니다.
올랜도 여행에 반 아이들은 많은 흥미가 있었습니다. 훌륭한 발표를 했고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친구들은 보내주신 자료를 아주 좋아했고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이렇게 학교 밖의 이야기를 알려주시는 건 세은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좋은 자료를 보내주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내주세요.
사진을 보니 세은이가 교실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고 있었고 친구들이 손을 들어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 가족 이야기가 수업 자료로 활용되다니. 세은이가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 대화의 중심에 있다니. 자료를 보낼 때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나는 영어 못하는 세은이가 학교에서 소외받지 않을까 늘 걱정했었는데 참 다행이다. 이렇게 기회를 주니 Mrs. Miller에게 참 고맙다.
실은 자료를 보내면서 아무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국에선 이런 식으로 여행기를 학교로 보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은 한국에선 선생님의 수업을 간섭하는 것일 수도 있고, 친구에게 잘난 척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아이가 괴롭힘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선생님 이메일 주소를 쉽게 알 수도 없다. 한국에선 학교와 학부모의 연락이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것에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미국 학교 문화가 한국과는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한국 문화가 이해되지 않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아내는 내가 여행기를 보내는 것에 대해 꽤나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서 온 세은이 사진을 보더니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것 같다.
선생님은 여행기를 계속 보내도 된다고 했으니, 앞으로도 그 말을 믿고 계속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에겐 '정 불편하면 학교에서 말씀해 주시겠지.'라고 얘기했지만 아직은 반신반의하는 눈치다.
모든 면에서 장점만 있었던 여행 PPT 만들어 학교 보내기 (미국 한정)
여행기를 보낼 때마다 세은이에게 발표 기회가 주어지는 걸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수업시간 발표까지는 안 해도,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니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세은이의 학교밖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과 경험을 공유하게 하는 것도 좋은 점이다. 왜냐면 세은이는 선생님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관심사로 대화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거다.
미국에서 영어를 못하면 태도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반 아이들이 아무리 착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고작 10살짜리 아이들이다. 말 안 통하고 수동적인 외국 아이를 일일이 챙겨서 놀아주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자료를 같이 보고, '지난주에 여행 얘기 재미있었어'라고 친구들이 관심 갖고 말을 걸어주면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영어가 부족해도 자기가 아는 얘기가 나오면 말하기 훨씬 수월한 법이니까.
영어를 못하는데 할 수 있는 말(내용)조차 없다면 그냥 가만히 있을 수 밖에는 없다. 기술적으로 영어를 잘하려면 오래 걸리니까,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호감 있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DyAnn에게도 여행기를 보여주고 선생님들의 반응을 전해주었더니 엄청 좋은 생각이라고 아주 잘했다고 한다. 선생님들 입장에서도 이게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방해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세은이는 소통이 잘 안 돼서 선생님이 도움을 줘야 하는 아이일 테니, 학교 밖에서 경험한 일들을 선생님과 공유하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될 거다. PTC때 ENL 선생님 Mr. Sweet도 그렇게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은이에게 발표할 기회까지 준 것은 반 친구들에게도 좋은 영향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나라 국내 여행을 막 서둘러서 다니는 사람은 보통 없지 않은가. 게다가 미국은 국내여행이라고 해도 멀리 다녀야 하니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좋은 곳이 많아도 실제로 가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가 그 먼 곳들을 수시로 다녀오면서 여행기로까지 만들어 공유를 해 주니, Mrs. Miller 생각엔 우리의 이야기가 반 친구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행히 같은 반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이 세은이의 여행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기보다는 그냥 재밌는 경험으로 받아들여주었던 것 같다.
세은이는 좀 부끄럽다고 했지만... 여기는 미국이니까 괜찮아.
학교에서 좋게 받아주니 여행기를 만들어 보내는 건 모든 면에서 좋은 일이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장점만 있는 일이 있을 수가 있지? 굳이 단점을 꼽자면 내가 시간과 노력을 며칠 들여야 한다는 것?
한국에서는 눈치 볼 곳이 많아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미국에선 학부모의 적극적인 학교 생활 참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미국에선 세은이가 혼자 힘으로 부족하니 내가 열심히 도와줘야지. 아빠도 이렇게 하면서 사는 걸 배운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기는 선생님들에게 일종의 가족 소식지처럼 정기적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DyAnn에게도 꼬박꼬박 보냈다. 과외할 때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아진다고 아주 좋아하셨다. 세은이에게 아빠한테 효도하라는 말까지 해주실 정도로...
우리의 여행기를 모두가 좋아하고 이걸 계기로 미국 사람들과 서로 연결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고 안심이 되었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