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SSN, 뉴욕 운전면허 그리고 혼자 살아남기
이민 정착 작업 1순위 : SSN과 운전면허
초반부터 열심히 했던 정착 작업들은 그 성과가 서서히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집과 차를 구하는 것 다음으로 꼭 해야 했던, 미국 거주자의 금융 활동에 필수인, 한국으로 치면 주민번호에 해당하는 SSN(Social Security Number) 발급도 완료되어서 카드가 집으로 배송이 되었다.
신분만 확실하면 발급받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코비드 때문에 방문 접수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대기하는 시간이 좀 있었다.
SSN은 내가 미국의 합법적 체류자임을 증명하고 신용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서류이다.
SSN이 없으면, 은행 계좌는 "임시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나중에 반드시 SSN을 입력해줘야 했고 차를 살 때도 100% 현금으로만 사야 했으며 신용카드 발급이 제한되고 휴대폰의 후불제 요금을 사용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
지역마다 있는 SSA(Social Secutiry Administration) 사무실에 방문하여 신청서와 그에 딸린 신원 증명 서류들을 제출하고 나면 한 달 내에 명함크기의 종이 카드가 우편으로 오게 되는데, 평소에 이 카드를 가지고 다니는 일은 거의 없고 번호만 알면 된다.
그리고는 SSN을 받아야접수가능했던 뉴욕 운전면허도 필기(온라인 시험)를 통과했고 임시운전면허증인 러너퍼밋(Learner's Permit)까지 발급되었고 5주 후엔 최종 도로주행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발급받은 국제면허증은 유효기간이1년이지만, 미국 장기 체류의 경우엔 입국 후 3개월 이상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꼭 새로 발급받아야 했다.(국제면허증은 여행자용이다.)
몇몇 다른 주에는 한국 면허증을 곧바로 미국 면허증으로 교체해 주는 곳도 있다고 들었지만 뉴욕에서는 새로 시험을 보는 수 밖에는 없었다.
현지 운전면허증이 없으면, 운전을 할 때 여권+국제면허증+한국면허증을 항상 한 세트로 가지고 다녀야 해서 한 개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게다가 일상생활의 신분증으로 쓰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데, 마트에서 술을 살 때 여권을 보여주면 점원이 당황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와 동시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지도 했다. 그렇게까지 동안은 아닌데.
나는 내 신분에 관계된 일들만큼이라도 가족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하고 싶었다. 왜냐면 아내가 도착하면 내가 아내의 것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SSN과 운전면허가 문제없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왼쪽) 명함 크기의 종이인 SSN. 비자에 따른 제한 사향이 적혀있다. (중양) 우리 집 마당 스프링클러. (오른쪽) 잔디 깎는 기계(Lawn Mower)
집 관리도, 밥 해 먹는 것도 공부가 필요해
날이 점점 더워지니 동네 여기저기서 잔디에 물을 주는 스프링클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땅 속에서 물 주는 장치가 튀어나와서 마당에 물을 뿌려주는데, 아파트에 살던 나는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서 옆집 Tim에게 도와달라고 문자를 했다.
Tim은 우리 집에 오자마자 차고로 가서 벽에 붙어있는 스프링클러 컨트롤러 박스를 열더니이것저것 만지니까 마당에서 곧바로 물 뿌려지는 소리가 났다.
Tim은 나에게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정해진 날과 시간에 스프링클러가 켜지도록 다 설정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나중에 켜고 끄는 것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비가 오면 스스로 작동을 멈추는 똑똑한 놈이었다.)
너무나 간단한 일로 연락한 게 좀 미안했지만, 아직 이 집에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고 어떻게 쓰는 건지 이게 정상인 건인지 고장 난 건지도 모를 것들 투성이었다.
며칠 뒤에는 집주인이 보낸 잔디 관리업체에서 잔디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주고 비료 작업도 하고 갔다.
마당에 작은 카트를 타고 다니면 잔디가 예쁘게 깎이는데 온 집안에 풀냄새가 가득하다.생소하지만 향긋하고 신선한 내음이다.
대개의 미국 주택 단지에서는 HOA(House Owner Asscociation)이라고 부르는 주택 소유주 커뮤니티가생활 규칙을 만들거나 동네 전체의 관리와 운영을 하고 있어서,자기 집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뭐 꼭 남들의 눈초리가 무서워서라기보다는 나도 이 동네 사람으로 남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도 하고, 이런 일들은 세은이와 아내가 오기 전에 내가 익숙해져 있어야 하는 일이니까 당분간은 Tim에게 자주 연락해서라도 혼자 해 낼 수 있어야 했다.
혼자 있는 데다가 재택근무를 하고 있으니 음식은 내가 직접 해 먹어야 했다.
한국에선 음식을 자주 하는 편까지는 아니었어도, 관심은 있어서 음식 만드는 방송이나 유튜브도 찾아보고 가끔 따라 하기도 했었다.
다행히도 한국으로 돌아간 우리 팀 전임자는 쓰고남은 양념통 일체와 조리도구 약간을 물려주고 가셨기 때문에, 마트에서 재료만 사면 음식을 충분히 해 먹을 수 있었다.
한인마트에서 파는 밀키트 같은 걸 사다가 먹거나 우버로 배달시켜 먹으면 고민 없이 해결할 수 있지만, 그런 건 정착이라 할 수 없고 앞일을 생각할때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
한인마트는 최소한으로 가고 주변 월마트 같은 곳에서 현지 재료를 사서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 낼 수 있어야 돈이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나는 끼니때마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일상생활, 그중에도한식만드는 유튜브 영상을 자주 찾아봤다.
자꾸 보다 보니 미국 마트에서 파는 식재료의 용도와 한국 식재료와의 차이점도구분할 수 있었고,영상을 따라서 몇 번 직접 시도하다 보니 마트에서 식재료 고르는 어려움이 금세 많이 줄어들었다.
마트에 가면 한국에서 파는 것과 같은 품목이라고 해도 실제로 먹던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삼겸살을 찾을 때는 번역기에 나온 대로 "Pork Valley"를 찾게 되지만 미국에서 이 부위는 한국의 삼겹살과 그 부위가 살짝 다르다.
그래서 막상 한국식으로 구워보면 삼겹살 느낌이 나지 않는데 사실 이 부위는 지방이 많아서 베이컨용으로 쓰는 고기이다. (Pork Valley의 아래쪽에 붙어있는 살코기까지를 포함해서 잘라야 한국의 삼겹살이 된다. 그런 식으로 잘라낸 고기는 한인마트에 가야만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 오래 사신 분들은 정육점에 가서 원하는 부위를 직접 설명해서 잘라오거나 아예 육절기를 구비해서 덩어리 고기를 스스로 썰어서 먹기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까지는 할 수 없어서 삼겹살의 대체품인 목살이 있을까 해서 찾아보니,"Pork Shoulder (목살 주변을 뼈까지 잘라서 판매)"를 포장해서 파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정확히 목살은 아니고 목살이 포함되어 잘린 부위이다. (Pork Butt, Boston Butt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마트에서 소분하여 파는 돼지고기 중에선, 이 부위가한국에서 구워 먹던 것과 가장 비슷한 맛을 냈고 가격도 한국의 절반이하(약 $4.5/lb ~1,250원/100g)여서 굉장히 자주 사다 먹었다.
(왼쪽) 한국재료와 미국재료를 섞어 만든 떡볶이 (중앙) Pork Shoulder. 중앙에 뼈가 있는게 특징. (오른쪽) 헤이니 엄마가 선물해 준 미역국.
"우리 서로 친구 해요." 다정해서 고마운 헤이니네 가족.
아직 나는 집에 혼자 있지만 함께 왔던 동기들 중엔 이미 가족과 함께인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세은이와 같은 나이인 헤이니(Heynie)네 가족이 그중 하나였다.
우리 집에서 20분 정도 남쪽에 있는 레이썸(Latham)에 살고 있는데 딸 하나, 한국 이름으론 "박혜인", 미국에선 헤이니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학교에도 헤이니로 등록했다고 했다.
하루는 헤이니 아빠가 메시지를 보내서 나한테 줄 것이 있다면서 잠시 집에 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헤이니 엄마가 혼자서라도 잘 챙겨 먹으라면서 미역국 한 냄비를 따로 담아 주었다.
헤이니 아빠와 나는 담당 업무가 달랐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이였고 미국에서도 같이 일하고 있지 않아서 그다지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호텔 생활 함께 했던 주재원 동기라고 이렇게 까지 신경 써준 게 참 고마웠다.
미역국 받아올 때 보니 집 정리도 안되고 살림도 부족해 보였는데 이렇게 음식부터 해서 나눠주신 거였다.
아마도 호텔을 떠난 내 안부가 궁금했던 것만이 아니라 곧 뉴욕에 오게 될 세은이도 궁금했을 것이고, 나중에 헤이니와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뜻도 이 선물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외로워도 부부끼리 참으며 견디면 되지만, 아이들은 같은 나이 또래 친구가 없으면 안 된다. 특히 영어가 서툰 헤이니나 세은이에겐 한국 친구가 더없이 절실하고 귀하다.
학교 적응과 친구관계로 걱정하는 건 헤이니네나 우리나 마찬가지여서, 진심으로 세은이랑 헤이니가 서로 의지하며 2년간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아직 세은이랑 헤이니는 만나지도 않았지만...
세은이가 미국에 오면 꼭 가족끼리 만나기로 약속하고, 미역국을 받아와서 한 며칠 잘 먹으며 지냈다.
사실, 주재원의 절반정도는 헤이니 아빠의 소속팀에서 온 사람들이어서, 헤이니네는 이미 친분 있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따로 만나자고 했을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우리한테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줘서 고마웠다.
이 시기를 지금 돌아보면, 나는 가족이 오기 전에 많은 것을 미리 해내야 한다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서 나중에 가족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 있던 채로 지냈던 것 같다.
원하는 것을 얻게 될 때까지 이 악물고 끝까지 해내야 했고 민망하고 창피한 순간도 피해 가지 말아야 했다.
가족이 곧 오기 때문에. 내가 알지 못하면 가족 모두가 힘들어지니까.
내가 그렇게 억지로라도 많은 것에 익숙해지려고 하는 동안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 세은이가 뉴욕에 오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미국에서 함께 하게 된 우리 가족
미국의 중요 휴가 시즌 중 하나인 독립 기념일(7월 4일)엔 우리 회사는 이틀을 쉬게 해 준다.
아내와 세은이는 독립 기념일 주간에 뉴욕 JFK 공항에 오고 나는 아침에 운전해서 공항에서 마중하기로 했다. 아내가 도착한 이후 휴일이 바로 이틀이나 붙어 있어서 천천히 쉬면서 동네 투어(?)를 시켜줄 생각이었다.
JFK 공항까지는 3시간 30분 정도 거리지만 교통정체가 심한 뉴욕시티를 가로질러 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까지 감안해서 조금 더 일찍 출발해야 한다.
정말 매일매일 이날만을 기다렸고, 비행기를 타러 간다는 어제 저녁 (한국은 다음날 아침) 아내와의 마지막 통화 이후엔 너무 설레어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4시간 가까이를 휴게소 한번 가지도 않고 운전해서 복잡한 뉴욕시티 시내를 지나서 무사히 JFK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 앞. 아직 1시간도 넘게 남았지만 아내와 세은이가 나올 1층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두 달 동안 가족과 헤어져 살다가 다시 함께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이 마음은 단순히 "설렌다"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이것은 "절실함"에 가까운 마음이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입국장 나오고, 대기선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하나둘씩 밝게 웃으며 자기 짝을 찾아 공항 밖을 나선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세은이는 언제 나오는 걸까.
마침내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뜨고,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린 끝에 세은이와 아내가 큰 짐을 끌고 입국장으로 나왔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아내, 귀여운 웃음이 그대로인 세은이가 내 앞으로 오고 있다.
나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뛰어가서 아내와 세은이를 안아주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을까.
우리가 각자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에게 말도 못 한 채 그 많은 것들을 혼자서 이겨내야만 했기에 지금 이 재회의 순간이 정말 절실했던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공항을 떠나지 못한 채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왼쪽) 출국용 코비드 검사를 마친 세은이. (중앙)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 인천 공항 면세점. (오른쪽) 각 나라 언어로 적혀있는 "환영합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큰 짐들을 차에 다 싣고, 공항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그동안 전화로는 할 수 없었던 얘기들을 나누었다.
처가 이야기, 아내가 부모님을 뵙고 온 이야기, 세은이 친구 이야기 등 한국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아내도 외롭게 지냈던 것 같다. 이제는 함께 하면 된다.
이런저런 얘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우리 동네 클리프턴 파크까지 왔다.
내가 사진과 전화로만 알려주었던 월마트, 주유소 스튜어트 샵, 나무가 예쁜 묘지길 등등을 지나서, 아직은 이삿짐이 도착하지 않은, 그래서 여전히 빈 곳이 많은 우리 집에 우리 모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아내는 집이 생각보다 큰 것에 놀라는 눈치였고 세은이는 2층에 자기 방을 만들 거라면서 신나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이삿짐이 예상보다 한 달 정도 더 늦어지게 되어서 아내는 이불 몇 개를 직접 가져왔는데, 2층 비어있는 방 하나에 이불을 깔고 임시로나마 지낼 수 있는 채비를 했다.
우리는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오랜 이동으로 세은이가 너무 피곤해해서 첫날은 일찍 자야 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 가족이 함께 할 수 있게 된 이 집엔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것이 많다. 마음속에 설렘과 걱정이 한꺼번에 피어오른다.
깜깜한 밤 길을 눈까지 감고 혼자 걷는데 같이 걷는 사람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여전히 깜깜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도 없는데 그 미지의 난관들을 혼자가 아닌 가족 모두 함께 이겨 내야 한다.
혼자 아닌 함께인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 미래에 대한 걱정 등 말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그 늦은 밤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나는 한참을 뜬 눈으로 누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