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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fton Parker Mar 24. 2024

7. Welcome to the neighborhood

July~August 2021

(커버 이미지 : 세은이의 미국학교 첫 등교 후 스쿨버스 귀가. 여름방학 때는 학생이 많지 않아서 버스가 집 바로 앞까지 올 수 있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드디어 시작하는 뉴욕에서의 가족생활

 

한 달 가까이 나 혼자 있던 집에 아내와 세은이가 오니 텅 빈 집이 비로소 Sweet Home이 되었다. 사람이 왔으니 사람 사는 집이 된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은 많았다. 나는 아내가 오는 것에 대비해, 미국에 도착 바로 다음날 핸드폰(Verizon), 은행(BofA) 그리고 코비드 백신(CVS) 등을 처리할 수 있도록 미리 예약해 두었다.

나 혼자 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1주일 넘게 걸려 마친 일이었는데, 미리 준비해 두니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약국에서 코비드 백신까지 맞고 나니 점심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우리는 집에서 와서 점심을 먹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이 예쁜 동네를 가족과 함께 거닐 수 있게 되어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동안 나만 보고 있었던 넓은 정원과 큰 나무들, 예쁜 집들,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는 다람쥐와 토끼 등 전화로만 얘기했던 것들을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보고 있으니 정말 신이 났다.


(위) 세은이, 아내와 함께한 미국 우리 동네 첫 산책
(왼쪽) 미국 코비드 백신 접종 증명서. 종이 카드에 볼펜으로 적어준다. (오른쪽) 세은이가 집 뒷마당의 토끼를 보고 있다. 토끼가 매우 흔한 동네다.


아내와 세은이가 도착한 지금은 미국 독립기념일로 모처럼의 연휴지만, 코비드 백신 미접종자는 외부활동 제한도 많은 데다 시차적응에도 시간이 필요해서 우리는 그냥 집에서 쉬기로 했다.

사실 나도 동네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모르는 게 많아서 가까운 마트 정도 가는 것만 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모험이고 여행이다.

어느 마트에 무엇이 있는지 가격은 어느 정도인지 보고 다니고, 세은이가 다닐 학교도 미리 가보고, 근처 공원에도 가고 소아과와 치과에도 가보고 나름 유용하게 휴일을 보냈다.

항상 혼자 외롭고 긴장하며 지내다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진정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즐거웠다.

 

"우리 동네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띵똥 띵똥
옆집 Lodico 가족과의 첫 만남

집에서 청소하며 연휴의 마지막 날을 쉬엄쉬엄 보내고 있는데, 저녁쯤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미국에서 우리를 찾아올 사람은 당연히 없으니, 아내와 세은이는 순간 동작을 멈추고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 보었다.

뜻밖에도 오른쪽 옆집에 사는 Mark, Sarah 부부와 꼬맹이 Gavin이 우리를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보니, 가족이 다 모인 것 같았어요. 축하해요. 우리 동네에 온 걸 환영해요.

Sarah는 우리 가족이 이사 온 것을 축하한다면서 손으로 쓴 환영 편지와 집들이 선물로 베리 파이(Berry Pie)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보냈던 이사 인사 편지에 고맙다면서 앞으로 자주 보면서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이곳에 이사 온 지 6년이 되었고, 4살인 첫째 Gavin, 이제 막 3개월 된 둘째 Grant까지 네 식구, 그리고 고양이 두 마리가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 집 첫 손님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싶었지만 앉아 있을 의자조차 없어서, 우리는 문 앞에서만 짧게 대화를 나눠야 했다. 나는 "이삿짐이 대서양도 아니고 태평양에 있어서 집에 앉을 곳이 없어요."라고 하고 나중에 꼭 저녁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예상 밖의 손님에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일부러 찾아와서 집들이 선물을 주고 간 것은 한국에서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고 하물며 미국 와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옆집 가족들이 돌아가고 나서, '미국 이웃이 우리를 이렇게 환영해 준다고?' 이게 정말 나에게 일어난 현실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미국에 온 이후로 항상 해야 할 일을 찾아다니며, 오로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어야 했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신경질 한번 내지 못한 채, 늘 긴장하고 있었다.

누가 나를 도와주지도 않았고 누군가로부터 환영한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고 마음 기댈 친구도 없이 외로워도 내색할 수 없이 참고 지내야만 했다.

혼자 있는 동안 밤마다, '앞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미국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면 정말 서글프고 슬픈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옆집에서 먼저 다가와서 선물까지 주면서 웃으며 환영한다 말해주니 그동안의 서러움이 한 번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나는 아주 작은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냈던 것인데, 그 결과로 이런 이웃들이 찾아와 주다니, 이건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 행운을 절대로 놓치지 말고 잘 키워나가야 했다.

 

Lodico 가족이 찾아와 준 것에 용기를 얻어서, 우리는 가족이 다 함께 살게 된 것을 알리기 위해 편지 보냈던 집들을 직접 찾아가서 인사하기로 했다. 

세은이가 어리고 영어를 못하니 어떤 식으로든 이웃들과 서로 얼굴을 익혀두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세은이는 밖에서 놀다가 남의 집 마당에 들어갈 수도 있고 길에서 다른 집 아이를 만날 수도 있고 강아지를 만질 수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이웃들을 미리 만나서 인사해 두면 좋을 것 같았다.


편지도 미리 보내놨으니 조금 말을 틀려도 큰 상관없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인사말을 미리 써보고 연습해서 열심히 외워서 각 집마다 찾아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인사 선물로 초코파이 한 상자씩 드렸는데, 모든 집에서 기쁘게 맞아주었고, 다들 내가 보냈던 편지를 잘 읽어보았다며 고마워했다. 사실 그걸 읽어줘서 내가 더 고마웠다. 

예전엔 누가 이사 오면 이웃끼리 인사하고 선물도 주고받았다고 하는데, 요즘엔 그런 문화가 많이 사라져서 아쉽다고 하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도 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떠나고 부부만 살고 있는 집, 한국 입양아 출신 엄마가 아들 셋을 키우고 있는 집, 고등학교 졸업반이라 아이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집 등등 다들 각자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모두들 우리를 환영해 주어 고마워요. 앞으로 잘 지내요."

 

(왼쪽) Lodico 가족이 우리에게 준 편지. (오른쪽) Gavin이 세은이에게 선물로 준 꽃다발. 자기 집 마당의 꽃을 꺾은 것이다.
(사진) 헤이니네 집 뒷마당. 아이들은 뒷마당에서 물놀이를 하고 놀았다.


서로 의지해야 하는 한국아이들 : 헤이니와 세은이

동네 이웃들에게 아내와 세은이를 소개하고 며칠 뒤, 우리 가족의 무사 입국을 축하하기 위해 20분 거리의 레이썸(Latham)에 사는 헤이니네 집에서 주말에 식사를 하기로 했다.

헤이니 엄마는 세은이가 미국에 오기 전부터 꼭 한번 만나자면서 혼자 있던 내게 음식도 해서 선물로 주었었다. 세은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말 고맙게도 집으로 식사 초대까지 해준 것이었다.

집에 가보니 헤이니네도 이삿짐이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기 때문에 집이 휑했지만 우리보다는 훨씬 나았다.

헤이니네 말로는 이삿짐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없는 것들이 많아서 중복되어도 당장 사다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고 했다.

특히 식기나 주방 가전 같은 것들은 아무리 이삿짐에 더 좋은 게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 안 사고 버틸 수가 없는데, 나중엔 오히려 한국에서 쓰던 것들이 오면 열어보지도 않게 될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 변압기는 좀 적게 살걸... 어차피 안 쓰겠구먼.'

그 외에도 아이가 써야 하는 물건들이나 옷 같은 것도 당장 사야 했고, 한국에서라면 안 사줬을 장난감 같은 것도 친구가 없는 이곳에선 사 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 아까 거실에 있었던 초대형 바비의 집.'

애초에 한국에선 갖고 있지도 않는. 마당에서 쓰게 될 물건들은 오자마자 샀다고 했다. 아예 이민 온 게 아니니 한국 갈 때 팔거나 버려야 해서 너무 비싼 것으로는 못 사고 그냥 적당한 것으로... 

그것마저 부럽게 생각한 세은이는 헤이니네 뒷마당에 있는 텐트와 작은 풀장을 자꾸 힐끗거리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과 한국 음식으로 식사를 하니 마치 서울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느낌이 좋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헤이니도 세은이처럼 영어를 많이 배워야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둘이 친한 친구가 될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학교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될 일들이 서로 비슷할 테니 말이다. 

주재원 동기 자녀들 중에 10살 여자애들은 세은이까지 4명인데, 두 명은 아직 미국에 오지 않아서 나중에 다 같이 모이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 

헤이니와 세은이는 만나자마자 서로의 처지(?)를 이미 다 이해하는 듯 금세 친해졌고, 뒷마당에서 물놀이까지 하면서 하루 잘 놀고 다음에도 꼭 다시 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미국 학교 첫 등교 그리고 과외 선생님 DyAnn

 

세은이가 다니게 될 학군인 Shen에는 하나의 큰 캠퍼스에 소속된 모든 학교(고등학교 1, 중학교 3, 초등학교 8)들이 모여 있다.

정말 웬만한 한국 대학교 못지않은 부지 크기에 다양한 시설이 있고 교내에선 차를 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큰 규모였다. 

학군 내 초등학교들에 외국인 학생이 많아서인지 여름방학에 학군 통합으로 5주간 ENL 수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다음 주부터 세은이는 여기에 등교한다.


ENL 선생님 Mr. Sweet

등교하기 전, 이번주에 ENL 선생님 Mr. Sweet과 세은이 등급 평가를 하기로 약속을 했기에 세은이를 데리고 학교에 갔다. 

학교 문 앞에서 인터폰을 누르고 이름과 방문 목적을 말하니 인터폰 아래에 이름과 방문 시간을 적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다 적고 나니 문이 열렸다.

방학중이라 학교엔 사람이 거의 없고 복도에 나와있던 Mr. Sweet과 인사를 하고 작은 교실로 들어갔다.

우리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던 건, Mr. Sweet은 한국인과 결혼해서 고등학생 딸도 있고 한국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세은이가 영어 하는 것보다 Mr. Sweet이 한국어를 더 잘했다.

아내분은 동네 부동산 중개업자인데 한국인들을 위한 통역 봉사도 하고 있어서 학교 학부모 면담 때 함께 참석해서 통역을 해주기도 한다고 했다.

ENL 선생님이 한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 한국인 통역사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세은이만이 아니라 아내와 나에게도 큰 안심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세은이의 영어 테스트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종이에 쓰인 문장을 읽고 그것을 기초로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는데, 세은이는 거의 소통이 안 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테스트를 길게 할 수도 없었고 예상대로 "Beginner" 등급이었다.

세은이는 비록 "예상대로" 낮은 등급을 받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밝은 모습으로 학교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빠를 기다리고 있던, 한국어가 엄마만큼이나 유창한 Mr. Sweet의 딸과도 짧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영락없는 여고생이었다. 


돌봄 교실 같던 ENL Summer School

학교 가기 전날, 나는 세은이에게 자기 이름, 아빠 전화번호, 우리 집 주소 그리고 "화장실 가고 싶어요" 이렇게 4가지를 영어로 쓰고 말할 수 있도록 수십 번 연습시켰다. 메모지에 적어서 가방에도 넣어두었다.

'영어는 하나도 못하는데.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빨리 배운다니까, 몇 달 지나면 괜찮으려나. 한국 돌아갈 때 아빠보다도 잘하게 된다는데 정말일까?'


마침내 등교일 아침이 되고 미리 신청해 둔 스쿨버스는 우리 집 바로 앞까지 왔다. 

뉴욕에서는 12세 이하 아동이 어디든 혼자 다니는 것이 법으로 금지(아동학대에 해당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가 스쿨버스에 타거나 내릴 때 반드시 부모 또는 미리 지정해 둔 대리인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아내와 내가 나와서 버스 타는 모습을 보며 세은이의 첫 미국 학교 등교를 축하했는데, 세은이는 설렘 반 걱정 반인 눈빛으로 버스를 탔다. 애써 우리를 쳐다보지 않고 가는 세은이가 안쓰러웠다.

버스가 떠나고 학교에서 전화가 오지는 않을까 해서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서너 시간쯤 뒤, 세은이는 생각보다 괜찮은 표정으로 스쿨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화를 내지도 울지도 않았고 호들갑 떨지도 않고 그저 한국 학교를 다녀온 듯,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다.


세은이의 말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너무 쉬워서 따분했다고 했다.

선생님과 학생 간의 소통은 개인별로 지급되는 학생용 노트북인 "크롬북(Chromebook)"에 있는 구글 번역기를 통해 하고 있었고, 제일 걱정했던 화장실은 굳이 허락받지 않고 자유롭게 간다고 했다.

방학중에 하는 ENL 수업은 학군 내에 속한 모든 초등학교의 외국인 학생이 대상이고 모든 연령, 모든 수준의 아이들을 모아 수업을 하다 보니 아주 기초적인 저학년 수준의 낱말 맞추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활동을 주로 하는 것 같았다. 

영어 공부 수준의 수업을 해주는 것 같지는 않았고 마치 외국인 어린이들의 돌봄 교실 같은 느낌이었다.

아내와 나는 사실 이 정도에도 만족했다. 왜냐하면 방학 수업에서 우리가 기대한 것은 대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5주의 시간 동안 학교 생활에 익숙해지고, 교실과 교내 시설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대하는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부모로서 우리가 바랐던 것의 전부여서 아무 불만이 없었다.

우리가 진짜 집중해야 하는 건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어 4학년 수업을 잘 따라가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할머니 DyAnn과 우리 동네 도서관(CPH Library)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세은이는 수업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너무 시시하다는 게 이유였다.

우리는 세은이의 수준을 맞춰줄 무언가를 찾아야 했는데, 헤이니 아빠에게 물어보니 영어 개인 과외 선생님을 소개받아서 헤이니와 아빠 둘 다 과외 수업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어서 헤이니 아빠한테 선생님 연락처를 받아서 세은이를 한번 만나 줄 수 있는지 연락했다.

며칠뒤 우리 집으로 찾아와 주신 DyAnn(다이앤)은 근처 초등학교에서 글 읽기를 27년간 가르치다 은퇴 한 선생님이고 언어치료사 자격이 있는 아주 유쾌한 할머니다. 우리에겐 너무나 적임자였다.

우리 회사 주재원 가족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 사람들도 많이 알고 계셔서 심지어 카카오톡 계정도 있었고, 이곳 한국사람들의 생활을 아주 잘 이해하고 계셨다.

그런데 가르치는 학생 수가 많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클리프턴 파크까지는 집까지 일일이 찾아오기 어려워서 동네 도서관인 Clifton Park Halfmoon Library에서 수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말 나온 김에, DyAnn과 함께 가 본 도서관은 학교에서 가깝고 집에서도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고 단순한 동네 도서관 같지 않고 규모가 크고 시설도 좋은 곳이다.

1층엔 대여할 수 있는 많은 책들, 곳곳에는 테이블과 의자, 전산 교육을 위한 시설도 있고 작은 스터디룸도 여러 개 있어서 도서관 회원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2층엔 어린이를 위한 책과 독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회의실과 강당까지 갖추고 있어서 단순한 동네 도서관이라기에는 아주 좋은 시설이었다.

DyAnn은 우리가 도서관 회원 가입을 하도록 도와주었고 과외하는 날이 되면 도서관에 와서 스터디룸을 예약해 달라고 했다. 

사실 도서관에서 과외를 하는 건 아내와 세은이 모두에게 잘된 일이다. 계속 집에만 있기보단 미국 도서관도 구경하고 영어 수업도 하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우리가 미국으로 간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은 적응도 빠르고 영어도 서너 달이면 금세 배우게 된다고는 했다.

알파벳 정도만 배우고 온 세은이의 수준이 고작 몇 달 정도로 나아질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없었다. 아마 다른 아이들은 영어유치원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게들 말하는 걸까?

그래도 그렇게 까지는 안되더라도 세은이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학교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진) 동네 공립 도서관 입구. Clifton Park-Halfmoon Public Library
(왼쪽) 도서관 뒷마당 정원에 설치된 책 읽는 개구리 동상. (오른쪽) ENL 선생님 처음 만나는 날, 학교 입구.


또 한 번의 9살 생일 & 세은이의 위시 리스트


세은이는 8월생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으니 한국에서는 열 살이다. (2021년 나이 셈법 기준)

그러나 미국 나이로는 다시 9살이 되어야 했고 9살 생일 파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약간 말장난 같은 느낌으로 세은이에게 재밌게 해 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딜 가면 아이한테 나이를 묻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럴 때 실수하지 않으려면 진짜로 9살 생일 파티를 하고 9살로 살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세은이가 미국에 오고 나서 굉장히 많은 것을 견뎌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다 한국에 있고 완전히 다른 세계로 와서 전혀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하려니 얼마나 부담되고 무섭겠는가.

게다가 이삿짐은 아직 오지도 않아서 침대도 없이 바닥에서 자고 좋아하던 옷도 없고 장난감이나 만화책 같은 것도 아직 없다.

어린아이지만 엄마 아빠처럼 말없이 이 상황을 견디고 버티고 있는 것이 늘 대견하면서도 미안했다.

아직은 집 상태가 친구를 집에 초대할 만한 것도 아니고(친구들이 와도 앉아있을 의자가 없는 지경이다.) 게다가 파티를 할 만큼의 친구들도 아직 없어서, 이번엔 아쉽더라도 집에서 간단하게 우리끼리 생일을 축하하기로 했다.

잠깐이나마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되도록, 갖고 싶어 하던 선물도 미리 몰래 사서, 아내와 함께 전날 밤에 포장하고 풍선도 불고 각종 장식도 했다.

엄마가 생일 카드에 예쁘게 그림도 그리고 최대한 정성이 느껴지도록, 그래서 세은이가 나중에라도 이 날을 생각하며 외롭게 느끼지 않기를 바라면서 준비했다.


다음날 미국에서 맞는 세은이의 첫 생일 아침은 소박하지만 우리 세 식구가 모처럼 크게 웃는 순간이 되었다.

세은이는 생일 케이크의 숫자 "9"를 보면서 나이가 줄어든 것에 황당해했지만 예쁜 장식과 선물에 즐거워하고 우리에게 환한 웃음과 재밌는 춤을 보여주었다.

너무나 고맙고 소중한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날이 이곳에서 늘 이어지기를 바랐다. 


(왼쪽) 다시 9살 생일을 맞은 세은이. (오른쪽) 세은이의 미국 여행 희망 목록.


그리고 어느덧 여름방학 ENL 5주 과정이 모두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은이가 개학하기 전에 2박 3일짜리 휴가를 뉴욕시티로 가기로 했다.

이것은 세은이에 주는 또 하나의 생일 선물로, 우리의 미국 첫 여행지를 세은이가 직접 정하도록 했다. 

사실 엄마 아빠도 모든 곳이 처음인 지라 어디를 가든 상관없었고, 세은이는 자기 방에 가서 잠시 고민하더니 자기가 가 보고 싶은 곳을 다섯 개나 적어왔다.

 뉴욕바다, 황소상, 자유의 여신상, 브루클린 다리 그리고 디즈니 랜드

동선상, 한 번의 여행으로 다 가볼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최대한 세은이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첫 여행 일정을 준비해야 했다.

세은이의 바람대로, 생일 후 며칠 뒤에, 방학이 끝나기 전 뉴욕시티 맨해튼으로 우리 가족의 첫 번째 미국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가 이 순간엔 몰랐지만, 2년간의 이민 살이와 미국 여행의 대장정은 이렇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Fondly,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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