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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풍 Jul 26. 2018

직업과 권력

신분사회, 그리고 인간성에 대하여

직업의 귀천


지난 대선 정의당은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말했다. 얼마나 노동이 당당하지 않으면 이 말에 공감할까. 노동이 당당하지 않다면, 비굴한 걸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돈을 벌려면 취업해야 한다. 취업하려면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 그래서 '있는' 부모는 매달 수백만 원을 교육비에 쓴다. '없는' 아이들은 고시촌으로 향한다. 천한 직업이 두려워서다. 가난으로 비굴해지기 싫어서다. 직업에 귀천이 있기 때문이다.


직업은 공동체에서 각자 맡는 역할이다. 수렵채집 시절, 사냥꾼과 가사돌보미가 유일한 두 직업이었다. 그때도 직업에 귀천이 있었을까? 생존을 위해 역할을 나눈 그들은 서로 도우며 살았다. 본능적으로 협력했다. 그래야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명은 권력을 낳았다. 고대 노예가 탄생했다. 이후 장원의 농노, 공장 노동자로 모습을 바꿨다.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린 지금 어떠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은 생명권과 자유권 같은 천부인권이다. 봉건사회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노동의 대가를 보장하기 위해 부린 억지다. 자본이 새로운 권력으로 등극하며 그 의미조차 변질됐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분리된 이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원칙과 달리, 경제는 소수에게 집중된다. 정치적 자유는 보장되지만 경제적 자유는 제한되는 새로운 사회가 생겨났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었다.
금송아지 숭배는 자본 숭배로 바뀌었다.
정체를 알 수 없고, 인간성이 결여된,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 냉혹한 모습으로.
- 교황 프란치스코 -


직장은 가족의 생계를 지키는 소중한 일터다. 누구에겐 심리상담센터 정도로 생각되는 듯하다.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광적인 분노, 아시아나 박삼구 회장의 신박한 애정행각은, 그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겐 재앙이다. 그들은 왜 신성한 일터에서 분노장애와 애정결핍을 호소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가능하니까. 법조차 막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만성질환, 직업과 권력의 위험한 동거를 살펴본다.



신분의 귀환


직업은 세분화와 전문화를 통해 효율을 높인다. 분업이 목적이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과거 직업은 곧 신분이다. 인도 카스트제나 유럽 봉건제처럼 우리에게도 노비세습제가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을 곡해한 독특한 직업관도 있었다. 에밀 뒤르켐은 특권과 계급을 상속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직업구조를 '강제적 분업'이라 정의했다. 그냥 쉽게 신분제라 보면 된다.


강제적 분업과 정상적 분업 사이 중간 단계도 있다. 바로 '아노미적 분업'이다. 19세기 나타난 이 현상은 '현대사회로 전환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도덕적 규범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는 병적인 분업'이다. 쉽게 말해, 신분제가 아닌 사회에서 왕 노릇 하는 자들이 나타나 횡포를 부리는데, 이를 막을 법과 제도가 없어 직업이 권력화 되는 현상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나타나는 과도기적 특징이다.


다른 듯, 닮은 듯


한국은 해방 후 급격한 산업화와 유교적 사고가 혼합되며 독특한 아노미적 분업이 나타났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이 아닌, 세습으로 직업이 정해진다는 수저 계급론은 전형적인 아노미적 분업이다. 모두가 풍족하게 살 자원이 있음에도, 소수의 병적 탐욕과 경쟁사회가 만든 인위적 허상이다.


뒤르켐이 살아 돌아와 한국에 방문해서 갑질과 재벌 문화, 그리고 수저 계급론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세계 11위 경제규모를 가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19세기 유럽이 겪은 병폐가 재현되는 모습에 어떤 견해를 가질까?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며 나타나는 과도기 현상으로 볼까? 아니면 사회가 몰락하는 전조(前兆)라 경고할까.



동방예의지국


뒤르켐은 분업화로 사회적 연대가 무너져 사회갈등이 생기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는 과도기적 시대의 해법으로 '개인을 중시하되 상호 존중한다.'란 원칙을 제시한다. 도덕적 개인주의의 핵심이다. 사회적 연대와 법의 공정성이 보장돼야 한다던 그는 100년 전 한국 사회를 예측한 걸까.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집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상호 존중하지 않는 문화다. 갈등 대부분은 인간에 대한 존중 결핍에서 비롯된다.


동양문화는 예(禮)를 중시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학식(學識)과 덕행(德行)이 높은 군자국(君子國)이라 불렸다. 공자(BC 551~BC 479)는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고조선)에 가서 예의를 배우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어진 사람이란 의미의 인인(仁人), 사양하기 좋아해 다투지 않는다 해서 호양 부제(好讓不爭)라 불렸던 동방예의지국은 어쩌다 지금같이 무례(無禮)함이 만연한 사회가 된 걸까?  


우리 유교문화는 시대가 지나며 변질됐다. 장유유서는 상명하복으로, 가부장제는 남존여비로 바뀌었다. 논어에 나온 군신부자(君臣父子) 어디어도 상명하복과 남존여비는 없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문화 대부분 인위적으로 조작된 허상이다. 일제 식민지와 독제를 거치며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됐다. 독재를 해도 경제만 살리면 되고, 인권을 유린해도 나라만 지키면 된다는 그릇된 인식과 함께 말이다.


예의와 존중은 다르다. 원래 한 뿌리를 가졌지만 격변의 근현대사는 이를 구분했다. 직장을 지옥으로 만드는 갑질, 직장인을 병들게 하는 불합리한 권위, 그리고 여성을 약자로 몰아 수치심이 빠트리는 직장 성희롱 모두 예의를 잘 못 이해한 착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상호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직장예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우린 지금 예(禮)를 따지기 전, 보다 근본적인 인간성부터 살펴야 하지 않을까?


정중함은 인간성의 꽃이다.
- 조세프 주베르 -



지금이란 단원(單元)


보편적 직업관은 무너졌다. '자아실현 수단이자 경제적 자립 과정'이라 배운 직업은 현실과 다르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한다. 직업을 위험하다 느끼기 때문일까? 건설 현장이나 유독물질을 다루는 위험한 직업이 있고, 생명을 담보한 만큼 대가가 따라야 한다. 하지만 위험하고, 더럽고, 어려운 일은 우리 사회에서 천시된다. 누군가에게 떠넘겨진다.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 같은 ‘다른 존재’, 차별의 대상에게.


다른 인간을 천시하는 이런 풍토가 나타나는 건, 사회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궁핍해지는 이유가 뭘까? 요즘 회자되는 4차 산업혁명 때문일까? 일자리가 부족해서 그럴까? 갑질, 꼰대, 흙수저, 비정규직 같은 사회적 갈등은 경제적 부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인간성, 휴머니즘 결핍이 원인이다. 그리고 비인간적 행위를 벌하지 않고 방치하는 시스템이 문제를 키운다.


승자독식을 허용하는 사회, 이를 막지 않는 법과 제도는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직업과 신분이 재결합한 지금 사회에서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한 지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은 지금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볼까? 차갑고, 잔인하고, 무례한 지금 사회가 고대 노예 사회보다 얼마나 진보했다고 생각할까? 그들이 보게 될 역사 속 지금 이 시대, 그 단원의 제목이 궁금하다.


2018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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