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창풍 Nov 12. 2017

[인문/철학] 도전, 바칼로레아

 Bac L 2017 - Philosophy 편

>> 바켈로레아(Baccalauréat)를 돌아본다.


지난 일기를 들여 보다가 2013년 「EBS 지식채널 ⓔ - 시험의 목적」 편에서 소개된 프랑스의 바켈로레아(Baccalauréat)에 대해 끄적였던 메모를 발견했다.


프랑스의 수능시험 바켈로레아. 암기력을 중심의 우리 수능과 다른 특별함이 있는 이 시험은 매년 6월 모든 프랑스 대학 진학자가 치러야 하고, 80%의 시험자가 합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번 떨어져도 재시험의 기회가 주어지는 이 시험은 선진국 프랑스 교육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까칠한 이유도...


[그림] 베켈로레아, 프랑스 어른의 악취미?


대략 10세기부터 우리 선조들이 치른 '과거시험'과 비슷한 프랑스의 바켈로레아는 1808년 나폴레옹 시대에 만들어져 200년 넘게 그 맥을 이어왔다. 이 시험은 대부분 필기로 치러지는데 우리와 달리 객관식 문항이 없다. 아마 그 이유는 시험을 통해 수험생의 지식수준을 보는 것이지 학습 수준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지적 탐구에 대한 경험이 목적이지,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과(S - Science)

문과(L - Literature)

경제/사회(ES - Economy & Social)

실업계(Technologies)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에 따라 시험을 치르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철학 시험의 경우 전공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치러야 하는데 무려 4시간 동안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논술 방식으로 답한다. 2017년 올해 바켈로레아가 던진 철학에 대한 주제에 답을 구해보고자 글을 쓴다.



>> Bac L 2017 - Philosophy


다음의 질문을 읽고 답변을 글을 서술하시오.

Sujet 1 : Suffit-il d’observer pour connaître?
→ Does observation equals knowledge?

Sujet 2: Tout ce que j’ai le droit de faire est-il juste?
→ Is everything I have the right to do fair?

[원문 보기]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이걸 보면 멘붕의 지옥을 경험할 것이다.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우리의 시험과 크게 다르다. 처음 보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으나 이것은 정답을 묻는 문제가 아니고 정답을 찾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다. 우선 논제에 대한 정리를 좀 해보자.


첫 번째 주제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진실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로 풀이될 것 같다. 또는, "우리가 관찰, 그러니까 인지하는 것만으로 지식(Knowledge)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가?" 가 조금 더 철학스러워 보인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물어본 선생님의 질문이 기억나 왠지 익숙한 논제이다.


두 번째는 법(Droit)과  정의(Juste) 관련 내용으로 보이는데 영어만 봐서는 뭔 소린지 알기 힘들다. 아마 "나에게 법적으로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모두 공정한 것인가?", 아니면 좀 더 쉽게 풀면 "법만 지킨다면 무슨 일이라도 허용되는 건가?" 일 것 같다.


글이 길어질 것 같고 헷갈릴 우려가 있어 이번 글에서는 우선 익숙한 Sujet 1만 풀어 본다.



>> 인지(認知)와 인식(認識)은 무엇인가?


본능이란 것, 갓 태어나 눈도 뜨지 않은 아이가 모유를 빨기 위해 두 팔을 뻗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생존 본능, 또는 원초적인 욕구에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식욕, 성욕, 수면욕을 3대 본능이라고 하는데 이는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욕구 계층론(Maslow's Hierarchy of needs)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다.


[그림] 매슬로우의 욕구계층론, 그리고 지금 세대


태아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모든 것이 연결된 체 자궁 속에서 평온한 시절을 보내는 중,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나오면서 처음으로 '고통'이란 걸 느낀다. 어떤 힘에 이끌려 나온 세상에서 그 작고 여린 생명은 차고 건조한 환경에 피부가 갈라지고, 연질로 이루어진 눈과 귀는 쓰라린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거기에 중력이란 피할 수 없는 사슬이 온몸을 감싸는 순간, 태아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아 X발, 이거 실화냐?'
- 태아 (0세)


이 충격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 성장, 표현의 욕구에 대한 의지의 발현과 더불어, 인지(認知)라는 불편한 존재를 처음 인식(認識)한 순간일 것이다. 물론 당시 언어라는 기억저장 수단이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졌겠지만, 인간이 세상에 나올 때 느낀 고통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억에 담는 사유(思惟)를 시작한 첫 지점일 것이다.


[그림] 영화 '향수'의 그루누이가 처음 인지한 사람의 체취


>> 지식(知識)과 지혜(智慧)에 담은 생각


인지(認知)는 인정할 인(認)과 알지(知)로 이루어진다. 아마 영어로 표현하면 Notice / Recognize 정도가 될 것이다. 자신이 신경세포를 통해 느낀 것을 뇌의 수집/처리 기능을 사용하여 감지하는 단계, 즉 '정보의 수집' 과정을 의미한다. 한편, 인식(認識) 역시 인정할 인(認)으로 시작하고, 이 또한 알 식(識)으로 끝난다. 이 역시 위의 두 단어 외에 달리 적절한 표현이 없다. 이를 알고 나니 다소 허무한 느낌을 받았지만 좀 더 찾아보니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일상적으로 늘 사용하던 '인지'와 '인식'이란 단어를 이렇게  깊게 생각한 적 없다. 둘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 체 계속 써왔던 것이다. 둘은 어떻게 다른 걸까? 이 실마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사한 계열의 단어 '지식'과 '지혜'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知識 (지식)

智慧 (지혜)


이 두 단어의 '지'는 부수에 해 일(日) 자가 하나 붙은 것으로 그 의미를 달리한다. 두 개의 알지(知/智)는 지식과 지혜란 단어로 나뉘면서 한자의 부수, 발(한자의 아래쪽에 위치한 부수)에 그 미묘한 차이를 둔다. 해학이 담긴 글자를 만든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며 잠시 생각을 멈춘다.


지식에서 쓰는 알지(知)는 화살 시(矢)에 과녁 구, 또는 입 구(口)를 사용한다. 여기에 해 일(日)을 붙여 지혜의 지(智)를 만든 것이다. 마치 에디슨의 전구가 깨달음의 상징이 된 것처럼, 어둠이 빛을 밝히는 것이 깨달음의 본질이라는 의미를 문자로 표현한 걸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Lethe)에 반대를 의미하는 A를 붙여 만든 '알레테이아(Aletheia)', 즉 '진리'란 단어를 보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어둠, 또는 무지함을 극복함으로써 삶을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인류의 보편적 특성과 가치관이 드러내는 것 같다.



>> 사유(思惟), '여유(餘裕)'에서 지혜를 얻다


생각해보면 인지와 인식의 차이는 명확해 보인다. 인지는 어떤 지식을 얻기까지의 과정이고, 인식은 이를 통해 지혜를 얻고 깨달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일 것이다.


인지 : Knowledge(지식知識)을 얻는 과정

인식 : Wisdom(지혜智慧)를 얻는 과정


영어권에서는 이 안다는 것을 Knowledge와 Wisdom이라 표현하고, 한자권에서는 지식(知識), 지혜(智慧)로 표현한다. 이런 사색의 끝에 더 나아가 밝은 것을 밝히다란 의미의 명철(明哲)이란 단어로 발전했고 Enlighten이란 표현을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확한 근거는 없다. 이는 나중에 종교적 측면에서 따로 다루어 보기로 하고, 지금 궁금한 문제부터 정리하도록 하자.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한 Key Question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욕구를 체우는 단계에서
지식(知識)은 언제 지혜(智慧)로 바뀌는가?


분명 진화론적, 사회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인류는 생존을 추구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물리적 안전이 보장되면서 지혜에 대한 향유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먹을 식량을 얻기뉘해 바쁘게 사냥하며 살아가던 삶에서, 농지에 씨를 뿌리고 곡식이 여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며 생긴 여유,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인간은 보다 고차원적인 지적 탐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보고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 인식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단계, 이를 우리는 사유(思惟, Speculate)라 표현한다.


이 사유를 함으로써 인간은 다른 동물들의 행동과는 다른 특별함을 가지게 됐고,이를  통해 지금의 문명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지혜의 발현에 대한 첫 번째 요건은 '여유'라고 조심스럽게 결론지어 본다.

 


>> 사유(思惟)와 친해지는 법, '자율성(自律性)'


사유(思惟)의 생각할 사(思)는 밭 전(田)에 마음 심(心)을 둔다. 생각할 유(惟)는 심방변(忄→心)에 새 추(隹)가 붙는데 아마 우리가 흔희 말하는 '최고'의 높을 최(崔)가 산을 향해 날아가는 새를 표현한다는 것처럼, 사유의 시작은 자신이 뿌린 씨가 곡식이 되길 여유롭게 기다리는 어느 농부의 눈에 띈 참새의 날갯짓을 보며 생각이 보다 고차원적인 곳을 향하는 순간을 표현인 듯하다.


[그림] 사유하는 인간의 1인칭 시점


서양 철학에서 자주 다루는 화두는 Knowing, 즉 안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인지하고 느끼는 행위 자체를 인식하는 것을 중요한 시발점으로 본다. 질문을 통해 자신이 느낌을 찾아가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란 유명한 말은 이런 서양 철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이것이 가진 의미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각은 인간이기에 잘 하는 것이고 인간이기에 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을 잘하는 이유는 그 어떤 생명보다 많은 여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즉, 자유롭기 때문이다.


미국의 과학사학자 겸 과학철학자인 장하석 교수는 지난 6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학교 다닐 때 역사를 정말 싫어했어요. 지금은 과학철학, 과학사를 하기 때문에 사학가가 됐지만(웃음). 이런 일이 일어났나 다는 사실들을 주입시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죠. 미국 유학을 가서야 아 역사는 사실을 암기는 과목이 아니라, 인간의 과거를 이해하는 과목이구나, 인간이 왜 이렇게 사는가를 알게 하는 과목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상당히 재미있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국민한테 과학을 조금이라도 가르쳐서 4차 산업혁명을 융성하게 한다. 이거는 말이 안 됩니다.”

- 장하석 교수 인터뷰 중


나 역시 학창 시절 역사나 과학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유학을 하면서도 공부란 것 자체에 큰 관심을 생기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타지에 혼자 있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글에 대한 칭찬을 종종 받았었고 그래서 더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처음 제출한 에세이에 가해진 무차별 빨간펜 난도질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됐고 이후 오랫동안 팬을 내려놨다.


하지만 글쓰기를 취미이자 삶의 여유로 느끼는 지금은 글 쓰는 것 자체가 즐겁고 편하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하기 때문이다. 이를 돌이켜 볼 때 지혜를 탐구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두 번째 요인은 '자율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과학은) 자연을 이해함으로써
유용한 기술을 발달시키는 현실적인 게 있고,
또 하나는 문화적인 것,
자연을 이해하는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거미가 집을 짓는 모습을 보고
탄복할 수도 있고,  하늘의 별을 보며
어떻게 이런 세상이 생겼나 하는 생각을
한다든지 하는 예술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적 기쁨을 과학에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 장하석 교수 -



>> '공유(共有)', 집단 지성의 '가치'를 소통(疎通)하다


단순히 인지(Observatioin)를 통해 얻은 지식(Knowledge)은 생리와 안전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 외 다른 욕구의 충족 요건이 될 수 없다. 그 이상의 욕구는 경험적 측면의 인지와 철학적 고민이 함께 수반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등적 차원의 욕구를 추구하는 이 영역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언어를 통한 소통을 필요로 한다. '안전에 대한 욕구' 바로 위에 위치한 '애정(Love)과 소속감(Belonging)에 대한 욕구'를 보면서 이를 생각해 본다.


[그림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 - 길프 알-케비르 사막지대


맹수에게 쫓겨 다른 부족이 있는 동굴에 들어간 경우를 가정해보자. 생명의 안전을 확보하였지만 그 안의 사람들과는 언어도 다르고, 생김새와 차림세도 묘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주린 배를 느끼며 "배고파"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에겐 식량과 가족이 있고 자신들의 고유 행동과 언어가 통용되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과 같다. 그곳에서 내 존재는 우연히 동굴에 들어온 들짐승과 다르지 않다. 먹을 수도 없으니 그들에게 나는 오히려 들짐승보다 못하다. 그들이기 식인 풍습이 없다면 말이다.


[그림] 본능적으로 '우리'를 형성한 수중 세계와 그를 관찰하는 인간


사냥을 하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리를 이루는 동물들과 달리, 무리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지적(知的) 교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화를 하여 생각을 나누는 것, 무언가를 보면서 공통된 감정을 글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 특성이자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이다.


과거 거대한 공룡의 틈새에서 몸집을 작게 하고 동굴에서 숨어 살던 우리 조상은 먹이사슬 최상위의 포식자처럼 '나'의 생존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지 못했다. 당시 우리와 같은 나약한 생물은 '우리'란 개념을 갖는 것이 멸종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우리란 개념을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 소통하고 생각과 가치를 나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나약한 다수가 사고할 수 있는 두뇌를 활용해 강력한 소수를 지배하는 지금의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혜의 발현에 필요한 세 번째 요소는 '공유'라 생각해본다



>>  지혜(智慧),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일상 속에서 인간이 무의식 중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인지한다는 것은 마치 장비의 센서나 컴퓨터의 메모리 장치, 또는 복잡한 수학적 알고리즘과 같이 자동적으로 처리가 되는 영역일 것이다. 아무리 이런 부분이 발달한 최첨단 기계가 나와도 이를 '생각하는 기계'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인지하는 것을 넘어 생존을 위해 계속 진화하려는 생물학적 본능과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특성,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온 사회의 결을 함께하고 이를 발전시키려는 마음, 즉 공유가치가 어우러져 있을 것이다.


최근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을 통해 사람들은 기계의 발전에 대해 수많은 견해를 내고 있다. 요즘 내 표현으로 '스마트 광풍'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어 있는 것 같다. 자동화, 무인화, 혁신적 속도 향상 등을 표제로 내걸고 있는 지금의 현상은 어쩌면 그 현상의 실질적 주인인 인간을 너무 배제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우려해 본다.


[그림] 노동력 vs. 창의력


위의 그림을 보면 일반적으로 위쪽 사진의 노동자가 잃게 된 일자리에 관심을 집중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아래쪽 그림에 있는 로봇들은 누가 만든 건가? 근육을 사용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에서 보다 창의적인 기술을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의 뛰어남을 반증하는 것 아닌가?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기준으로 경재를 형성하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낮은 차원의 능력의 사용에 대한 대가를 바탕으로 앞으로 올 경제구조를 그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현재 수준으로 발전해온 인간에 대한 모독이고,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조금 더 똑똑한 가축'의 역할은 이미 기계가 많은 부분 대체하고 있고, 인간의 지성은 보다 높은 탐구와 이상을 향한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기술적 인프라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왜 과거의 방식에 매달리는 걸까? 왜 지금 오는 인류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 끝내며


바켈로레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런 접근이 우리의 시험문화보다는 좀 더 낮다는 것에도 많은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런 경험을 너무 빨리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해본다. 지식에 대한 탐구가 단지 대학 진학을 위한 관문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한번 고민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 2017년 11월 12일. 급격히 추워진 어느 날, 벌써 봄을 기다리며.




위키백과 - 인식론 - https://ko.wikipedia.org/wiki/인식론

네이버 지식백과 - 비 은폐성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170&cid=41799&categoryId=41800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 - https://ko.wikipedia.org/wiki/%EB%A7%A4%EC%8A%AC%EB%A1%9C%EC%9D%98_%EC%9A%95%EA%B5%AC%EB%8B%A8%EA%B3%84%EC%84%A4

[광고 사례 모음] 매슬로우 7가지 욕구 위계를 기반으로 한 광고 전략!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aumcood&logNo=220857308143&categoryNo=96&parentCategoryNo=0&viewDate=¤tPage=1&postListTopCurrentPage=1&from=section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知識 and 知恵 ? - https://hinative.com/en-US/questions/18765

EBS 지식채널 ⓔ - 시험의 목적 - www.ebs.co.kr/tv/show?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10155120

지과필개(知過必改)의 한자 유례 - http://chilhakgrun.tistory.com/entry/%E7%9F%A5%E9%81%8E%E5%BF%85%E6%94%B9%EC%9D%98-%ED%95%9C%EC%9E%90-%EC%9C%A0%EB%9E%98

그리스 신화 저승의 5개의 강 - ko.jedi.wikia.com/wiki/그리스_신화_저승의_5개의_강

[천지일보 시론]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明哲)” - 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987

Tough Rules, Tougher Questions - https://www.parisupdate.com/french-philosophy-part-vi-take-2017-bac-philo-exam/

같은 생각이지만 같지 않은 생각 - https://www.facebook.com/notes/유영만/같은-생각이지만-같지-않은-생각/737417426282952/

EBS 다큐프라임 - 동과 서 - baking.tistory.com/entry/EBS-다큐프라임-동-과-서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인터뷰 -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100&artid=201706240900001

장 바티스트 그루 누이(Jean-Baptiste Grenouille) - egloos.zum.com/grimper88/v/137935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