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illenials, 포스트 민주화 세대의 미래는?
세계대전, 사춘기와 같은 격동의 시절을 겪은 세계는 이후 물리적, 생물학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영위하였다. 반면 심리적, 정신적 측면의 불안정성은 점점 우리 사회에 스며든 체 수십 년을 지내왔다. 그런 와중 우리가 사는 세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밀레니얼즈(Millenials)란 신 인류를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추구하던 약속된 미래의 안정보다, 지금 이 순간의 삶과 행복의 영위가 중요하고, 자신의 은행 계좌에 잠시 쉬어가는 월급보다 자신의 SNS 게시물에 달린 좋아요(Likes)의 숫자를 보고 도파민(Dopamine)이 반응하는 세대, 이것이 우리 사회가 맞이한 신 인류, 밀레니얼즈이다.
그들은 과거 어떤 세대보다 스마트하고, 불의(不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간의 본성인 행복에 대한 가치를 주장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한다. 어쩌면 인류가 오랜 기간 동안 추구해온 이상적인 사회의 참된 주인에 어울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왜 그들은 불평이 많고 인내가 부족하며, 사회적응을 못하는 '문제아'로 인식되는 걸까? 숫자로 나타나는 평균 근속연수만이 그들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지표일까? 혹시 그들의 문제가 아닌, 기존 잘못된 체제의 한계를 외면하고 살아온 우리들의 문제는 아닐까?
우리 밀레니얼 세대가
삶의 의미(Purpose)를 추구하는 것은
본능(Instinct)과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가 각자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이를 모든 사람이 찾을 수 있도록
지금의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 마크 주커버그, 2017년 하버드 연설 中
앞으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잘 알아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주인인 세상으로 바뀔 것이 분명하기에, X-세대의 끝자락에 태어나 그들에게 지금의 권력을 이양할 의무가 있는 우리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 생각의 원인과 동기는 무엇이며 그들과 더불어 사는 방법이 어떤 건지 고민해보고자 글을 써본다.
1980년부터 2000년 사이 태어난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 즉 밀레니얼즈(Millenials)라 부른다. 지금 기준으로 18세에서 38세를 지칭하고, 다른 말로 Y-세대, 또는 에코 부머(Echo boomer)라 불린다. 이 세대는 스마트폰, SNS, 이모티콘을 자연스럽게 다루고 신기술에 민감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에 따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장기적인 글로벌 경기침체에 따른 불안과 고용 불안이란 범 세계적인 문제들과 씨름하며 각기 나름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세대, 불행 속 희망을 찾는 세대란 점을 인지하고 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세대는 각자 자신의 짊을 지고 사는 세대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리더십 전문가인 사이먼 사이넥(Simon Sinek)은 지금 밀레니얼즈가 겪고 있는 문제의 첫 번째 원인을 잘못된 교육에서 찾는다. 그가 말한 데로 "너는 최고야. 뭐든지 할 수 있어"란 말을 항상 듣고 자란 그들은 노동력이 거의 없는 어린이를 짐짝처럼 여기며 살아온 기존 세대의 세계관과 큰 차이가 있다. 전례 없이 존중받는 유년기를 보낸 그들은 성장하면서 급격한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성세대보다 앞서는 기술 적응력을 보였고, 어른에게 귀속된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들 고유의 문화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보인다. 지구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그들은 앞으로 시장의 주요 소비자가 될 것이고, 기업의 문화와 생산방식을 바꿀 것이며, 이를 통해 정치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것임이 확실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항상 그래 왔듯이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문화가 아직 사회 저변에 깔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에서의 그들의 위치는, 세상을 바꾸는 영향(Impact)을 행사하고 싶은 그들에게 한없이 답답할 것이다. 사이넥은 지금 사회, 특히 기업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이 것'이 그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전재하에 새로운 환경과 리더십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목적(Purpose)과 세상을 바꾸는 영향(Impact)을 중요시하는 그들에게 파티션이 아닌 멋진 디자인의 개방형 사무실을 제공하는 것, 또는 휴식 공간에 다양한 먹거리와 당구대를 놓아주는 것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낙후된 환경에서도 열정을 잃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릴 경우 이전보다 많은 좋아요(Likes)와 팔로워 수가 생긴다면 말이다.
한국의 밀레니얼즈는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그것과 닮은 점도 있지만 여러 면에서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겪은 시대적 상황에 기인할 것이다. 세계가 함께 공유한 산업혁명, 세계대전, 냉전체제, 석유경제, 금융시장,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 등 공통적인 정치·사회적 변화를 함께하고 있으나, 그 큰 흐름에서 파생된 우리나라의 기구한 역사와 민족정서는 또 다른 모습의 '한국형 밀레니얼즈'란 형태를 만들어 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18세기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유혈 시민혁명을 통해 권력 지배구조를 재편했던 반면, 그릇된 유교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왕이 외세를 끌어들여 백성을 몰살한 동학농민운동부터 시작해서 친일 식민지배가 끝나는 시점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시민이 권력을 갖도록 허용된 적이 없다. 이후에도 수많은 독재권력과 싸우는 과정은 있었으나 그 결실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민주화는 시민 혁명을 통해 자주적으로 이룬 것이 아니고 냉전체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쪽짜리 민주주의를 만들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 권력은 지난 과오를 덮기 위해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시키기 위해 여러 방편으로 부단히 노력했다. 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 전선을 한반도 이남을 경계로 두려는 미국의 의도와 함께 상당 부분 결실을 맷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의 밀레니얼즈는 경쟁 도착증에 빠진 우리 교육 현실 속에서 눈과 귀가 가려진 채, 세상을 보는 견문을 넓힐 역사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도 배우지 못한 체 사회에 내던져졌다. 전 세계 밀레니얼즈가 느끼는 사회 초년생의 무력감과 함께, 그들의 특징인 삶의 목적(Purpose)과 세상을 바꾸는 영향(Impact)에 대한 열망을 꿈꿀 여유조차 없이 살아온 우리 밀레니얼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우리는 어떤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할까?
최근 장례식장에서 이전에 다니던 회사의 직장 선배를 만났다. 그는 '요즘 신입사원'에 대해, 그들에게 무언가를 시키면 "내가 왜요?"라고 대답한다며 푸념한다. 대기업에 다녔던 그 선배와 나는 십수 년 전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당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존재인 기업의 위압감에 압도되어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만 해도 '다나까'를 쓰는 것이 당연 시 됐고, 상사가 야근을 하면 나한테 주어진 일이 없어도 함께 야근을 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베이비부머와 X-세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우리 사회는 경제적, 사회적 입지의 우위에 선 이전 세대의 생활양식에 손을 들었고, 그렇게 우리 X-세대는 자유를 갈망하는 본성을 숨기고 그들을 따랐다.
당시 TV에서는 화려한 신세대를 위한 춤과 음악이 나오고, 지금 보면 다소 오글거리는 카피로 당시 대다수의 기성세대를 '정신 산란하게' 했지만, 개인으로써의 나란 존재와 조직 사회에서의 나란 존재가 전혀 다른 두 얼굴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자기 검열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점점 변화했다. 자신 안의 마음의 외침과는 달리 사회의 요구에 순응한 것이 우리 X-세대가 선택한 길이였다.
어쩌면 우리 X-세대는 지금의 밀레니얼즈를 보며 소소한 질투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순응했던 억압을 그대로 전달하기엔 양심의 가책이 생기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리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한편, 그들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마치 군필자가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이 바뀌 듯, 지금의 불합리한 사회적 헤게모니(Hegemony)도 지금의 사회 구조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판을 바꾸려면 기존에 없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지시를 당연시하는 상급자와 이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자율을 갈망하는 부하직원 사이에 서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할 일과 책임이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류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해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그 속에서 생기는 기회와 역할이 앞으로 나아야 할 길 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쿨하게 부하직원을 퇴근시키고 밀린 업무를 한 뭉치 집으로 가져오는, 자기 삶이 없는 워커홀릭 인체 하루하루를 보낸다.
2008년 처음 지금의 회사에 입사할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대기업 4년 차 사원은 갑자기 팀장이 되어 팀원을 받기 시작했고, 준비가 안된 체로 PM(프로젝트 관리자)이 되어 사업을 수행했다. 업종까지 변경한 탓에 업무 관련 아무것도 모르는 팀장과 외인부대로 꾸린 우리 팀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사태를 수습하는, 시쳇말로 남이 싼 똥 치우는 역할을 주로 했다. 아, 당시의 고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오만가지 감정이 든다.
어쨌거나 나는 다소 어린 나이에 중간관리자란 역할을 맡다 보니 그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 결과 언젠가부터 퇴사하는 팀원의 수가 점점 줄고, 일하는 것이 좀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와중 내가 나름 내린 '중간관리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이 자리 잡았다.
솔선수범
희생정신
실행력
조율 능력
뛰어난 한수
아직 나 자신이 리더라고 느끼지 못하기에 '리더의 덕목'과 같은 난해한 주제는 다루기 힘들지만, 중간관리자가 해야 할 역할을 우선 살펴보고 이런 관리자를 이끌 리더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다.
조직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전체 조직의 사명을 구성원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이다. 단순히 매출 목표 달성, 비용 절감이나 신 사업 개발 같은 것은 굳이 개개인에게 전달할 필요가 없다. 채용이라는 난해한 과정을 넘을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갖춘 직원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고 그런 것은 이해시키기보다 본인 스스로 중요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조직문화, 방향성, 그리고 개인과 조직의 목표를 하나의 결로 맞추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매우 어렵다. 특히, 지금의 직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밀레니얼즈에게 조직의 목표가 개인의 발전에 어떤 도움이 된다고 설득하는 것은 그 개개인의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담을 쌓게 되는 결과가 생긴다. 이 부분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단어 중 하나는 '꼰대'이다. 물론 예전부터 속으로 삼키며 지내온 시간이 짧지 않지만, 요즘 들어 이 단어는 인터넷이란 자율 공간 속에서 자주 회자된다. 왜 그런 걸까?
'부장님'으로 대변되는 이 단어는 신인류의 유머감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 틀이 좁음을 인식하지 못한 많은 기성세대를 일컫는 단어로 마치 조선시대 가면놀이와 같이 권력 서열에 대한 비판을 풍자하고 희화화한다. 하지만 이 현상이 단순히 웃음거리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통째로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는 아마도 세대 간의 차이에 대한 공감을 이루어 내지 못한 체 함께 공생하는 두 부류가 겪는 권력 구조의 모순 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유교사상을 근간으로 다소 편향적 권력을 자유롭게 누린 우리 사회 구조와, 이를 따르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을 보낸 기성세대, 그리고 어릴 적부터 조건 없는 존중을 받아오던 밀레니얼 세대의 입장차로부터 만들어져 왔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 일어난 박근혜 탄핵 사태와는 별개로, 그 시절의 독재와 무리한 산업화에 따른 재벌 중심의 경제 구도, 그리고 수많은 헌법질서를 향한 유린 행위는, 지금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의 단초를 제공했다. 따라서 정치가로서의 박정희에 대한 내 개인적인 평가는 매우 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그 시대에 필요한 리더였음은 일정 부분에 국한하여 인정할 수 있다. 탄광의 막장에서 피땀 흘려 일하는 광부를 '산업전사'로 탈바꿈하고, 구로공단에서 하루 18시간 미싱을 돌리는 노동자를 ‘수출의 여인’으로 탈바꿈한 그의 마술, 어쩌면 지금 시대에 필요한 리더의 자질일 수 있다. 물론 지금 박정희가 후보로 나온다면 독재가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지금의 밀레니얼즈는 기성세대에 비해 정보 수집력이 뛰어나고 개개인의 판단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전재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 시대 리더십은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 밀레니얼의 눈에 콩깍지, 또는 요즘 말로 필터를 씌워 그들이 착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그들을 평가하고 관리할 성과평가체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들은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것보다,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고, 권력을 가진 누군가 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비 권력자에게 자신에 대한 평가를 맡기는 것을 좋아하는 그들은 다분히 민주주의적 사고를 가졌다. 나같이 편협된 시각을 통해 자신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유리함을 익힌 세대와는 다른, 그런 신 인류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릴 적 나는 게임을 좋아했다.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산 사람들은 게이밍 콘솔을 기억할 것이다. 아타리, 페미콤, 닌텐도,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이어진 게임 시장을 생각하면, 그 시대를 화려한 추억이 회상될 것이다. 아마도 X-세대란 용어는 게이밍 콘솔을 통해 자신의 자율성과 한계를 체감하며 살아온 우리 세대의 단면을 나타낼 것이다. 인류가 이 땅을 밟은 이례, 가장 억압적인 시대에서 해방되고 싶은 몸부림 직전, 우리는 베이비붐 세대가 만든 구조적 삶의 틀에 반발하는 중간단계에서 간절기의 역할을 한 건 아닌까 생각이 든다.
요즘 나는 롤(League of Legend)이란 게임을 즐겨한다. 이 5 vs. 5의 전투게임은 예전 개인 미션을 달성하는 이전의 게임과 달리, 팀 전체의 밸런스가 승패의 주요 원인이 된다. 개인이 아무리 잘해도 질 수 있는 이 게임을 하면서 왜 이 게임에 밀레니얼즈가 열광하는지 생각해본다. 결국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살았던 우리 세대가 협업과 공동책임의 시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요즘 밀레니얼즈의 대답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실제로는 게임 자체의 재미와 역동성에 빠져 계속하게 되지만 굳이 풀이하자면 그렇다.
딱히 어떤 것을 결론 낼 수는 없다. 밀레니얼즈에게 휩쓸려 만들어 가는 세상이 반드시 옳은 세상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이 살아가고 주도해야 할 세상이라면, 하루빨리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그러한 인식을 그들이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젊어서 고생, 늙어서 신경통이다.
- 작가 미상
브런치 - SNS, 좋아요(like(it))와 공유 - https://brunch.co.kr/@ysp0722/459
나무 위키 - 비디오 게임의 역사 - https://namu.wiki/w/비디오%20 게임의%20 역사
Simon Sinek on Millennials - https://www.youtube.com/watch?v=OPaQPWfqjmw&t=70s
에릭 홉스봄의 "시대" 시리즈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onrue&logNo=22015357237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마크 저커버그 하버드 졸업 축사 - https://www.youtube.com/watch?v=0yp42P9zjAM
수출 1번지 구로공단의 도약과 고비, 그리고 부활 - www.bp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2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