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월요일 아침. 우경은 출근하자마자 최 상무를 찾았다. 최 상무는 조금은 놀란 듯하다가도 이내 표정을 고쳐먹으며 우경을 반갑게 맞았다.
“아니 한 달 정도는 쉬고 나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아무튼 잘 왔네.”
“상무님께서 잘 아시다시피 벌써 반년 넘게 쉬었습니다.”
“아... 하하... 벌써 그렇게 되었나? 사무실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 그나저나 회장님께서 좀 보자고 하니 오늘이라도 시간 내서 한남동 본사에 좀 다녀오도록 하게.”
“그런데 상무님. 회장님 편지는 시간이 좀 지난 듯하던데 왜 이제야 저한테 주셨는지요?”
“역시 이 팀장 눈치가 빠르군. 일종의 배달사고라고 해두지. 자세한 건 나보다 자네를 더 신뢰하는 회장님께 직접 듣는 게 좋지 않을까.”
“네에. 그럼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본사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해결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무슨 문제를 해결해주면 되겠는가?”
“김상미 과장과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많이 불편합니다. 저를 본사나 다른 계열사로 보내주시든지 아니면 김 과장을 그렇게 하시든지 부탁드립니다.”
“아... 그 문제라면 아마도 잘 풀릴 수 있을 것 같으니 조금 기다려보지.”
“그럼 본사 다녀와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해고와 해고 취소, 복직과 대기발령, 보직 해임과 직급 강등. 지금까지 내려진 말도 안 되는 모든 처사가 최 상무 혼자만의 짓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최 회장의 생각이었을까. 최 회장은 무슨 연유로 날 보자고 한 것일까. 최 회장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경의 머릿속은 복잡했고 마음은 부글부글 끓었다.
울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우경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군 복무도 서울 근교에서 한 터라 서울이 익숙했지만 서울을 혐오했다. 무엇보다도 콩나물시루 속의 콩나물이 되어야 하는 지하철 2호선이 죽을 만큼 싫었다.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서 지하철을 타다 보면 지각이나 자체 휴강은 다반사였다. 20여 년 전의 일이건만 지하철 2호선은 우경의 본사 출장을 망설이게 했고, 자신이 꼭 가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자의든 타의든 이리저리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서울을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어쩌면 서울 본사에서 남은 직장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기회의 땅인 서울에서 또 다른 변곡점을 지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작년 결혼식에서 최 회장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사이 최 회장은 몰라보게 수척해졌으나 여러 면에서 평온함이 느껴지는 것은 최 회장의 배경으로 보이는 조망 때문이었을까. 강렬한 햇살을 반사하는 윤슬로 인해 저 강물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건지 남에서 북으로 가는 건지 헷갈렸지만, 뒷배경의 황홀경은 마주 보는 한 사람의 정체를 미화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술에 취한 그윽한 눈동자의 수정체에 아름다운 사물만이 조영 되듯이.
“이 팀장. 어서 오시게.”
최 회장은 우경의 오른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면서 과도하리만치 친근감을 표시했다.
“자네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네. 이렇게 빨리 마음 정리가 될 줄은 몰랐는데, 좀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더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네.”
“회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허어. 무슨 그런 말씀을. 이리로 편히 앉게나.”
최 회장은 본인을 위해서나 회사에 필요한 일을 맡길 때면 그 사람이 누구든 과도한 친절을 베풀었다. 물론 배려라는 명목으로 흰 봉투를 건네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우경은 최 회장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여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짐작 가는 데가 있었지만 비위를 맞추는 질문은 필요해 보였다.
“제 발로 떠나기를 원하신 줄 알았는데, 지금 다시 부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혹시 민주노총 때문에......?”
“허허. 직설적이고 급한 성격은 여전하구먼. 나는 자네의 그런 면이 참 좋아. 허허. 무엇보다도 그냥 우리 모두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라고 해두지.”
“그런데 상무님은 저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믿지 못하는 사람 아래에서 일을 도모하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내 아들이지만 좀 못난 구석이 있어서 그럴 테지. 아마도 자네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허허. 대표이사 자리 물려준다고 하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야. 나는 이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야. 자네가 해준다면 나도 후일을 봐주겠네.”
최 회장은 그 뒤로도 혼자서 한 시간 넘게 떠들었다. 주로 지나간 일에 대한 자랑이었으나, 우경은 그 모두가 자신의 일이었고, 그것은 회환과 탄식으로 남았으므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일은 회사의 녹을 먹는 자의 몫이었다. 우경은 서울에서 창원으로, 그리고 양산으로 근무지를 이동하면서 그때마다 생각하고 다짐했다. ‘회사를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일이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한다면, 그건 우리 모두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내가 관리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면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자.’
최 상무는 대표이사직을 물려받았다. 우경은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관리팀장으로 복귀했다. 김상미 과장의 혼인과 임신에 대해 회사 사람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김상미는 산기가 있다는 이유로 이른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우경의 복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거나 회사의 조직개편에 불만이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