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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Jul 25. 2019

박제된 기억, 유리된 역사

로마 (Roma, 2018)

<로마>의 첫 화면에 들어서면, 부감의 앵글숏에서 바닥을 청소하는 물결이 보인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파도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후반부의 바다에서의 파도와 조응한다. 그래서일까. 쿠아론이 역사를 재현하고 바라볼 때의 태도는 파도의 특성과 유사한 지점들이 있다. 숏을 움직이는 방식에서 보이는 역동성도 그렇지만, 거스를 수 없는 파도의 형태를 역사에 비유하여 치환하려는 점도 그렇다. 이것은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파도가 오는 걸 막을 수 없듯이, 영화가 스크린 안에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그 가운데에서 쿠아론이 발을 내딛는 위치다. <로마>는 실상 쿠아론 개인의 서사와 당시 멕시코의 역사상이 포개어져 있지만, 남의 일을 보듯 무심할 뿐이다. 다른 영화들이 재현의 사실성에 집착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과장된 해학과 조롱으로 시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체험시키려고 노력할 때, 쿠아론은 고의적으로 무관심하게 시대를 바라본다. 쿠아론의 무관심이 세계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영화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 시대가 가지는 색을 빼버린 상태에서 시작한다. 인물들은 시종일관 달리고 움직이지만, 탈색된 세계에서 숨결과 역동성은 반감된다. 시대를 기억하게 할 만한 소품들도 최소화된다. 그는 칼라로 남아있는 자신의 기억이 살아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오히려 기억을 박제시켜 영화의 시공 안에 봉인한다. 자신이 키우던 개의 머리를 박제하던 로버트 집안처럼 말이다.
 
이렇듯 박제된 기억의 서사는 시대의 서사와도 거의 유리된 채 작동한다. 클레오와 소피아의 일가의 서사는 영화의 시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된다. 그들의 위기도 시대상과는 관련이 없다. 소피아는 남편을 잃지만 그것은 남편의 외도 때문이고, 아이들의 위기도 바닷가에 놀러 가서 벌어지는 일이다. 클레오의 불행은 그녀의 남자 친구 때문이다. 그녀의 가족이 당하는 불행도 마찬가지다. 클레오는 고향을 떠나 멕시코로 와있기에 그들의 불행을 언어로 전달받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인물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유리되어있다. 군악대가 소피아의 집 앞을 지나가지만 소피아는 그저 바라만 볼뿐이다. 가구점에서 클레오가 시위를 바라보는 장면은 유리된 역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숏이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폭력적인 진압의 장면은 클레오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과 동일시된다. 그 순간, 클레오의 가구점으로 침입자들이 들어온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시대가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구점 시퀀스가 가지는 지점은 의미심장하다. 박제된 기억과 유리된 역사가 만나는 순간, 클레오의 양수가 터진다.
 
이렇듯 <로마>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와 개인을 연결하려고 노력한다. 아니, 이미 역사와 개인이 연결되어있다는 전제하에 출발한다. 영화에서 숏이 운동하는 방식을 보도록 하자. 프레임 바깥의 것들을 준비해놓은 다음,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포섭하게 만든다. 프레임 바깥(역사)의 맥락이 프레임 안의 인물에게 들어오려고 하는 구조인 것이다. 클레오가 <로마>라는 세계에 놓인 맥락은 어떠한가. 클레오와 소피아는 분명히 연대하지만, 그 안에서의 위계구조 역시 선명히 드러난다.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클레오는 소피아의 집에 가정부로 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후의 장면들이다. <로마>는 오프닝에서 제시했던 전제를 스스로 거부하기 시작한다. 바닷가 시퀀스로 가보자. 소피아의 두 아이들이 파도 속에 휘말려 들었을 때, 클레오는 수영을 못함에도 그 둘을 살리기 위해 애쓴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 순응했던 클레오는 처음으로 그 흐름에 반기를 든다. 아이들과 소피아를 부둥켜 앉고, 그녀는 자신의 죄의식을 고백한다. 쿠아론의 선언은 그 순간 터져 나온다. <로마>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P.S 이것이 <로마>를 감상하고 난 직후의 생각이다. 그러나 제반 사항을 알게 되고 나서 찝찝한 지점은 있다. 물론 쿠아론의 연출은 굴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있지만, 유년시절의 가정부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영화마저도 이렇게 테크닉적이고 강력한 방식의 연출을 사용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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