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 (Marriage story, 2019)
0.
<결혼 이야기>을 보면서 찰리(아담 드라이버)가 대변하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남성들’이 떠올랐다. 이는 <결혼 이야기>에만 등장하는 특별한 캐릭터는 아니다. 수없이 많은 로맨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입으로는 사랑을 했노라 말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길 바라는 남자들이다. 그런 남성들은 관계 속에서 여성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성들이 바라보기에 여성들은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본다. 이렇듯 영화는 어느 쪽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마치 게임의 N회차 플레이처럼, 완전히 달라지는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안에서 일반화된 남성성을 규정하고 까내리려고 꺼내는 글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 맺는 방식과 그것을 둘러싼 결혼이라는 존재에 대한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로 돌아가 보자. <결혼 이야기>은 표면적으로는 찰리와 니콜(스칼렛 요한슨)의 이혼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결혼과 이혼이라는 단어의 뒷면엔 맥락과 맥락의 싸움, 언어와 비언어의 싸움이 치열하게 펼치는 전장이다.
1.
<결혼 이야기>는 인물의 맥락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알려주다가도, 어떤 때는 마지막에서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니콜의 관점으로 영화를 따라가다 그녀가 찰리의 바람을 고백하는 순간,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영화는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찰리의 시선을 따라간다. 영화의 리듬 또한 절묘하다. 장르가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치고 빠지는 동안에, 우리는 두 인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보내고 있고, 마주 보고 웃으며, 각자의 맥락을 이해할 것만 같이 느낀다. 심지어 아직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아무런 예고 없이 돌출된 행동들, 법정과 변호사들 사이에 앉아있는 그들의 긴장감은 여지없이 그들이 이혼 조정 중인 상태라는 걸 주지 시킨다. 이해할 수 있다가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행동의 완급 조절은, 이해와 오해의 잔혹한 차이가 공존하는 삶의 속성과 닮아있다.
감독은 이러한 속성을 영화 안에 펼쳐놓고는,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 찰리를 데려온다. 찰리는 끝내 니콜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는 다분히 중의적이다. 그것은 정말로 니콜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일 수도, 표정일 수도, 언어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 찰리는 연극의 세계에 속해있는 사람이고, 니콜은 영화의 세계에 속해있는 사람이다. 연극의 장소는 유한에 가깝지만, 영화의 장소는 무한에 가깝다. 찰리는 뉴욕을 떠나려 하지 않지만, 니콜은 뉴욕을 떠나고 싶어 한다. 니콜은 이미 그녀가 속한 세계만으로도 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셈이다.
2.
영화는 끊임없이 니콜이 보내는 신호를 주지 시킨다. 그러나 찰리에게 ‘대화’란 언어화된 언어들 간의 교환일 뿐이다.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LA에서 살겠다’는 말이 없었으니, 당연히 뉴욕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는 헨리(야지 로버트슨)를 대하는 태도에도 드러난다. 아직 어려 말을 잘하지 못하는 헨리의 심정을, 찰리는 알지 못한다. 이혼에 이르기까지, 우리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전사(前史)에는 니콜의 수많은 신호와 제스처가 겹쳐져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 이는 이혼을 조율하는 과정인 영화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니콜은 영화 내내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찰리의 영역인 말로도 얘기해본다. 중후반 나오는 둘의 싸움 시퀀스를 보자. 찰리가 그토록 원했던 말의 향연 안에서도, 진심과 거짓은 섞인다. 서로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던 싸움 후 찰리는 허망함에 무릎을 꿇는다. 감정과 진심을 다 쏟고 난 후, 그 자리에서마저도 거짓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그들은 굳게 닫힌 자신의 문을 연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남성은 그제야 자신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해서 극적으로 둘은 재결합하지도 않는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했을 뿐이다. 이제 다시 시작할 뿐이다. 그리고 영화도, 다시 시작된다.
3.
영화의 시작, 각자의 장점을 말하는 자리에서 니콜은 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미 기록된 말의 끝에는 해결의 실마리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원래의 운명처럼 이어진 상태로 존재했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결말처럼 서로의 끊어진 실을 간직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무엇이 좋은지는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결혼’은 비록 제도이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체념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란 걸, 그것이 관계보다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음을 감독은 힘주어 말하는 듯하다. 그런 상태야말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지키려 했던 가치와 맞닿아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가 이혼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임에도 ‘결혼 이야기’인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