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2018)
1.
단적으로 말하자면 <아사코>는 ‘실패의 세계’다.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키워드인 ‘불신’은 이러한 실패의 세계 안에서 완성된다. 속을 알 수 없는 아사코(카라타 에리카)의 행동을 보면서 후쿠시마 사고 이후 믿음을 잃어버린 일본 사회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다른 글에서도 많이 나오니 더 이상 여기서 언급을 하진 않겠다. 그보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실패의 연속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영화는 이상하게도, 이야기가 완성되려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실패하게 만들고, 인물이 이루는 목적이 달성되려는 순간에 훼방을 놓는다. 내러티브나 인물에게만 그런가. 카메라는 반드시 보여 줘야 할 시퀀스를 의도적으로 놓치고, 영화라는 매체가 응당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룰마저 깨뜨려 버린다.
2.
반복해서 말하듯이, <아사코>는 실패로 점철된 세계다. 인물들은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아사코와 결혼하고 싶었던 료헤이는 결혼식 직전에 튀어나온 바쿠에게 아사코를 뺏긴다. 그렇게 바쿠의 세계로 완성이 될 것만 같았던 아사코는 불현듯 다시 돌아가 훼방을 놓는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간 아사코는 료헤이가 이루려던 목적에 부합했는가? 믿음이 깨어진 료헤이는 아사코로부터 도망치고, 결국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허공을 보며 영화는 끝난다.
세계 안의 존재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는 바쿠의 실종되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고, 그 6개월 전의 전조 증상만을 보여줄 뿐이다. 정작 정말로 중요한 실종의 순간은 아사코의 내레이션으로 처리되며, 곧바로 료헤이의 세계로 건너뛴다. 이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드라마를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영화 중간중간 비집고 들어오는 다른 장르는 무엇인가. 예컨대, 마야의 연극, 바쿠의 CF 장면 같은 것들은 프레임을 제시하지 않고 돌출되어 얼마간 차지한다. 관객들이 인물에게 몰입을 하면 안 된다는 듯이, 잊을만하면 다른 질감의 화면을 보여주어 드라마를 방해한다. 누가 봐도 튀는 컷을 넌지시 제시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이웃 블로거 달팽이님의 글1)에도 지적된 바 있다.) 감독은 마치 영화를 완성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규정한 방법을 수행할 따름이다.
3.
<아사코>는 두 개의 세계로 구성된다. ‘바쿠’의 세계와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의 세계다. 바쿠의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과 료헤이의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완전히 떨어져 있다. 영화는 원제부터 이를 암시하는데, 일본어 제목인 ‘寝ても覚めても’, 즉, ‘자고 있으나 깨어 있으나’라는 뜻은 아사코가 자고 있을 때이든 깨어 있을 때이든 바쿠와 료헤이의 자장 아래에서 머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가 2개의 세계로 진행되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영어 제목인 ‘Asako I&II’가 더 직접적이다.) 감독은 제목에서부터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 거칠게 얘기하자면, 하나의 세계가 유기적으로 존재하거나 하나의 세계로 완수되지 못하고, 두 개의 독립된 세계로 기능할 것임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두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아사코뿐이다. 또한 두 세계는 충돌 끝에 둘 다 실패하고, 그 균열 사이에 아사코만이 남을 때, 영화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감독은 실패한 세계들을 설정한 후, 그것들의 충돌을 통해 영화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기존 통념을 깨뜨리고만 싶어 하는 치기 어린 몸짓이 아니라는데 있다. 영화는 마치 테제와 안티테제가 모두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쿠의 세계, 료헤이의 세계, 그 사이의 아사코. 어느 하나 부정당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세계.
4.
나는 이제까지 ‘실패’라는 단어와 ‘완성’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써왔다. 그러나 <아사코>야말로 실패라고 규정되는 것과 완성이라고 규정되는 것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극장에서의 지진 이후, 아사코와 료헤이는 서로의 사랑은 확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반에서는 그 조차 명확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음을 밝혀진다. 이는 달리 말하면 ‘믿음’이나 ‘불신’, ‘희망’, ‘절망’ 따위의 단어로 일컬어지는 것들에 대한 불분명함이기도 하다. 재난 이후, 모든 것이 뒤흔들린 세계 안에서 영화란 어떤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그의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을 증명하게 만든다. 연대와 단절은 가치 판단으로 명확히 구분된 세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뒤흔들린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하마구치 류스케가 꿈꾸는 세상이자 영화의 모습은 아닐까. 그와 같은 용기는 누구도 쉽게 낼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을 영화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1) https://blog.naver.com/xddbbx/221659476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