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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Oct 12. 2019

노동의 신화는 지하로 침잠한다.

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2019)

지하철이 움직이는 이미지를 상상해보자. 지하철은 맹렬히 지하도를 다니지만, 그는 횡으로 이동할 뿐, 결코 종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김정근의 <언더그라운드> 속 노동은 이와 닮아있다. 지하의 노동자들은 기착역에서 종착역으로 전철을 움직이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질을 하며, 닫히지 않는 문 밑으로 그어진 선은 가로로 뻗어있다. 어쩌다 잠시 올라오더라도 이내 다시 내려가야만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온 청소 노동자들, 지상으로 잠깐 올라온 기관사는 결국 다시 지하의 세계로 침잠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횡의 운동은 <언더그라운드>가 보여주는 노동의 연대기, 즉 역사의 운동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역사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듯이,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사라지는 노동자들의 순서로 운동한다. 부푼 기대를 품고 회사에 취직하려는 공고 학생들은 사라져 버린 매표 직원과, 무인으로 운전되는 차량에 앉아있는 기관사의 모습으로 치환된다. 마치 노동의 결말인 것처럼 말이다.
 
감독은 지하철 내부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대신 그것을 둘러싼 풍경에 카메라가 놓는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그들의 현재를 보여주는데 치중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똑같은 일터지만 하청업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동자, 고단한 청소 노동자들의 노래, 사라져 버린 매표소를 추억하는 매표 노동자 등등. 김정근은 그들 이야기 하나하나보다는, 고의로 파편화하여 지형도를 그리는데 열중한다. 마치 지하철 노선도처럼, 연결되어있지만 각자 독립된 역들의 조합인 셈이다.
 
감독의 전작 <그림자들의 섬>(2014)을 생각해본다면, 이와 같은 방식은 생경해진다. 뛰어난 스토리 텔러였던 그가, 상대적으로 약한 내러티브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차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뜨거운 투쟁의 현장과 분노를 삼킨 뒤, 한발 물러서 노동의 지형도를 파악하고, 다가오는 냉혹한 미래를 감각시키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목적을 적확히 달성한다. 정확하게 멈추고 출발하는 지하철처럼, <언더그라운드>는 지하철을 닮아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언더그라운드>가 품는 한계 역시 명확하다. 매끈하게 잘 빠져나온 영화에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다. 감독이 준비해온 정확한 의도 아래, 영화에 나오는 인물과 공간들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이미지가 다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질문해본다면, 나는 망설여진다. 물론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존재한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전철과 기관사를 보면서, 우리는 노동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해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더그라운드>만의 질문이거나 혹은 왜 이 영화를 통해서 나와야 하는 질문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 질문의 방향은 어느 정도 이상 진전되지 못한다.
 
노동의 신화가 지하로 침잠되지만, 영화의 질문은 허공 높이 떠다닌다. 어쩌면 김정근은 이 간극을 고의로 의도한 것은 아닐까. 그 공백을 관객 스스로가 채워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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