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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Oct 12. 2019

내가 아직도 가영이로 보이니?

하트 (하트, 2019)


‘내가 아직도 가영이로 보이니?’
 
갑자기 변주된 장르에서 가영의 대사는 <하트>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선언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대사는 그녀의 세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가영의 세계는 무엇인가.
 
그녀의 작품들을 놓고 언제나 언급되는 것들이 있다. 거의 바뀌지 않는 공간, 선형적 진행, 두 배우의 대화만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강조되는 공통 요소는 주연으로 계속해서 등장 중인 ‘정가영’이라는 인물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녀의 세계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정가영’이라는 캐릭터는 그녀가 구축한 세계를 확립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남성, 남성은 정가영의 작품의 필수요소다. 헤어진 연인이자 친구(<비치온더비치>), 선배(<밤치기>), 애인 있는 남자(<내가 어때섷ㅎㅎ>) 등등 감독은 다양한 남성 군상 중 하나를 택해서 그들이 어떻게 여성의 유혹에 굴복하고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성들의 위선, 지질함, 여성 혐오, 우유부단함 등을 남성 스스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역전된 상황에서 초라해지는 남성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정가영’이라는, 감독의 이름과 동일한 인물이 위치해있다. 언뜻 보기에 그녀의 존재는 실제 감독의 인물상 같기도, 아니면 다른 자아 같기도 하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정가영’은 그녀의 세계 속에 중요한 기능이라는 것은 분명한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존재는 정가영의 세계에서 장점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런 장점만큼 정가영이라는 요소는 뼈아픈 지점이 되기도 하는, 양날의 검이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언제나 생각하는(응원과 격려의 여부를 떠나) 문제는 영화 외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내적인 요소와 뒤섞어 진실게임을 하는 것에 있다. 즉, ‘정가영’이라는 캐릭터가 실제로 그러한 캐릭터인지, 영화 속에 말하는 사건들이 실제를 기반으로 한 것인지는, 하등 상관없는 사실이지만 감독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니 언제나 그녀의 작품은 영화 내적으로 논의되지 않는, 좀 심하게 말하면 감독 그 자신의 이미지에 기생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다. 캐릭터가 영화를 잡아먹고 마는 것이다. 이 글 역시 그것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이러한 약점과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하트> 역시 초반에는 마찬가지의 결로 진행한다. 가영에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부남을 등장시켜 무너짐을 반복하는, 그 전의 남성 군상과 별 다를 바 없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다 갑자기 전작들과는 다른 얘기가 진행된다. 그동안의 자신을 대하는 비판의 소리를 모두 담은 듯, GV를 재현하여 자신을 해명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치기 어린 시도로 보기에는 그녀가 말하는 선언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관객과 평단에 대한 애증 어린 감정을 고백하기도 하고, 이제는 자신도 변화해야 할 시기를 직감하고 ‘정가영’과 작별의 인사를 하기도 한다. 이전보다 더욱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던지는, 최후의 직구인 셈이다.
 
이제 정가영은 ‘정가영’과의 작별할 것이다. 그것이 좋아지든 나빠지든 껍질을 깨고 다른 세계를 보여주려는 감독에게 격려의 마음을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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