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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Apr 09. 2020

고양이는 어디로?

엘르 (Elle, 2016)

<엘르>에서 고양이의 존재는 생각보다 많은  시사해준다. 영화 초반, 미셸(이자벨 위페르) 강간을 방관하던 고양이는 중간에 잠깐 등장하여 점프 스케어 역할을 수행한  사라진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고양이는  버호벤의 태도와 닮아있다.
 
나는 방금 앞에서 고양이가 강간을 방관했다고 하였다. 고양이는 미셸의 대사처럼 ‘   할퀴지못하는 무력한 존재인 마냥 묘사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고양이는 미셸의 창문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시퀀스에서 고양이가 점프 스케어의 장치로 이용되는 것도 그렇지만, 무력한 존재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 더욱 불쾌하다. 실상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도 짐짓 물러서서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는 척하는 카메라는 다분히 자기기만적이다.
 
<엘르> 세계는 기만적인 카메라가  작동하도록 설계된다. 영화는 물리적인 세계와 심리적인 세계로 나뉘는데, 물리적인 세계는 ‘정상적으로 우리의 상식에  부응하지만, 심리적인 세계는 ‘비정상적인, 각자의 욕망을 어김없이 내보이며  욕망에 충실한 세계다.  버호벤은 거침없이 인물들의 욕망을 전시한다. 욕망을 가진 이가 주체화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인물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한 발자국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보자. 정상과 비정상을 설정해놓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감독인가? 관객인가? 누가 그것을 설정해놓았든, 결국 감독은 자신이(혹은 관객들이) 생각하는 정상과 비정상을 설정해놓은 상태의 세계를 펼쳐놓는다. 또한 주체화된 욕망은 결코 물리적 세계를 침범하지 못한다. 죽어버린 패트릭(로랑 라피트) 함께 비밀로 묻혀버리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를 침범하지 못하는 욕망은 결국 내적 세계에만 갇힌다. 그러다 보니, <엘르>에서 발현되는 모든 욕망은 2명만 남아있는 은밀한 공간에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서 카메라는 인물의 내밀한 공간을 침투하는데 허락을 받은 특권적 위치다. 그러나  버호벤은 이러한 특권적 위치를 영화적 장치를 통해 동일화시킨다. 미셸이 패트릭을 쌍안경으로 관음 하며 자위하는 씬을 보도록 하자. 쌍안경을 집어 든 다음 샷은 미셸의 시점 아이리스 샷이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감독은 미셸의 욕망을 우리와 동일화시킨다. 카메라의 특권적 위치는 잊히고, 우리는 똑같은 욕망의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게 한다. 물론 그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있겠다. 여기서 나는 되묻을 수밖에 없다. 세계를 헤집던 카메라가  강간 장면에서는 무력했냐고. 미셸의 강간 장면은 누가 봐도 고양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영화의 모든  중에  컷만이 카메라의 개입이 불가하다. 그곳은 카메라가 아니라 고양이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순간만큼은 카메라가 무력해져야 한다. 패트릭을 죽이는 빈센트(조나스 블로켓) 파티장에서  미셸을 따라왔는가? 없어진 고양이의 존재만큼이나 이는 숙제로 남겨져 있다. 이것은 단순히 내러티브의 구멍이 아니다. 복수극을 완성하기 위해  버호벤은 필연적으로 패트릭을 움직여야만 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미셸의 아버지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장르의 완성을 위해서 패트릭은 죽어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장르의 미완성을 위해 아버지는 죽어야 한다.  버호벤은 이미 <엘르> 세계를 완벽히 장악한 것이다.
 
혹자들이 <엘르> 두고 말하는, ‘진실게임 통제된 세계에서 무의미해진다. 감독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모호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엘르>  버호벤의 세계이지, 미셸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의 욕망에 따라 진실은 달리 기록된다.’라는 명제를 면피의 수사로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실상 진실은 정해져 있으면서도,  진실을 모르는 이들을 조롱하고는 우리에게 동참할 것을 청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 역사 수정주의의 관점에서 일본 우익들에게 옹호받았던 사례를 생각해보라) 의도된 모호함 앞에서, 우리는 저도 모르게 조롱에 동참하게 된다.
 
무엇보다 <엘르>에서 가장 문제인 지점은,  모든 것을 여성의 얼굴로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 살해, 히치콕의 관음증, 사디즘과 마조히즘적 성욕의 주체, 그동안 남성이 선점해왔던 위치를 여성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남성성을 덧씌운 여성에 불과하다. 통제된 세계의 여성은 근본적으로 대상화된다.  버호벤은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전시하고 즐긴 다음, 여성의 얼굴로 책임을 피하려 한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페미니즘의 언어를 조롱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곳의 욕망은 남성적 욕망이지, 여성적 욕망이 아니다. 사라진 고양이의 진실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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