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하나만 들어줘 (A Simple Favor, 2018)
폴 페이그 영화들을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그의 영화를 가리킬 때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전복’이다. 그는 언제나 장르에서 기대하는 전통적 구조나 단어가 명명하는 의미에 대해서 엇나가는 행동을 취한다. 그런 측면에서 <부탁 하나만 들어줘> 역시 마찬가지다.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를 차용한 듯한 내러티브 구조에 블랙 코미디를 끼얹은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그야말로 욕망에 충실한 여성들이 벌이는 소동극이다.
영화를 자리 잡고 있는 세 축의 인물을 살펴보자. 전통적인 여성상에 충실한 스테파니(안나 켄드릭)와 전통적인 남성상에 충실한 숀(헨리 골딩)의 사이에는 일종의 팜므파탈 역할을 하는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삼각구조는 미국 창작물에서 흔하게 설정하는 삼각구도 관계, ‘베티와 베로니카’의 그대로 본뜬 형태이다. 폴 페이그는 두 명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세워놓고는 정작 인물의 목적이 되어야 할 사랑(숀)을 배제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니 영화는 두 명의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벌이는 무시무시한 전투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두 여성은 자신의 무기를 적극 이용해 전투에 임한다. 두 인물을 각자의 정체성 즉, 전통적인 여성상과 팜므파탈 여성상을 부정하지 않은 채, 자신이 가진 성질을 무기화한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오로지 여성만이 입장 가능한 전장이다. 그곳에 남자들이 낄 자리는 없다.
우리 역시 <부탁 하나만 들어줘>를 전복적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다. 영화 초반, 에밀리를 도와주는 스테파니를 학교의 학부모들은 어떻게 지칭하는가? 그녀는 에밀리에게 이용만 당하는 순진한 여성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들여다보면 스테파니는 명백한 침입자다. 그녀는 자신의 공감 능력,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으로 에밀리에게 접근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에밀리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 역시 그녀의 공감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만약 그녀의 속성이 여기서 그쳤다면 남성들의 성녀 판타지에 그쳤을 테지만, 스테파니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도 하다. 오히려 에밀리보다 더 욕망적인 인물이기도 한 그녀가 불러들이는 파장은 에밀리가 벌이는 행동보다 더욱 파국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2명의 남자를 죽였고, 1명의 남자를 죽일 뻔한다. (에밀리가 숀의 살인을 결심한 하는 건 다름 아닌 스테파니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녀를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영화는 성녀의 속성을 가진 스테파니에게 그동안 부여해왔던 역할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관객들은 은밀하게 그녀에게 설득당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남성 판타지의 조롱에 동참하게 된다. 팜므파탈은 재정의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녀 에밀리는 어떨까? 그녀의 무기 역시 매혹적이긴 마찬가지다. 에밀리는 전통적인 팜므파탈의 속성을 지녔지만 남자들이 자신을 두고 싸우게 만들지 않는다. 그녀의 시작이 되었던 부친 살해부터 전조가 보이는데, 남성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하려 할 때, 그녀는 남성들이나 관심 있는 가부장의 옥좌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쌍둥이 자매는 아버지를 죽이고는 ‘집안’을 나와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그녀의 욕망은 스테파니와는 다른, 생존의 욕망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을 거리낌 없이 제거한다. 스테파니가 관계 지향적인 욕망이라면, 에밀리는 관계 단절적인 욕망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남성은 필요하지 않다. 남성이 필요하지 않는 팜므파탈은 자신의 매력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남성에 의해 유능함을 규정당하지 않는다. 에밀리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건 오로지 그녀 자신과 스테파니뿐이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인물들이 표면적으로는 어떤 전복도 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악녀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남성 문화가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쓰이는 명제 역시 실현한다. 스테파니와 에밀리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부여했던 속성을 유지한 채 그녀들에게 씌었던 한계를 붕괴시킨다. 여성이 부러 남성적 속성으로 변화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전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여자답게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폴 페이그가 조망하는 여성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