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무비 (The Lego Movie, 2014)
0.
영화가 강한 목적성을 가졌을 때, 우리는 흔히 어느 순간 그 목적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훌륭한 프로파간다 영화는 자기도 모르는 새 배경에 깔려있는 대전제를 납득시켜버리는 영화다. 그것은 마치 전쟁 영화의 전장에서 모두가 겪는 차별을 깨달으며 구성원들의 화합을 감동적으로 그려내지만, 전쟁의 아이러니는 전혀 다루지 않는 영화와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레고 무비>는 훌륭한 아동용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생각한다. <레고 무비>는 ‘상상은 평등하다’라는 감동적인 명제로 우리의 허를 찌르고는, 영화 밖에서 실제로 작동하기 원하는 행동을 추동한다. 가지고 놀 때와 똑같은, 그 교묘한 스톱 모션의 움직임을 보아라!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부모들은 지갑을 열고 레고를 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놀랍게도 영화 안 실사의 세계에서도 통용된다)는 진짜 명제는 다시 한번 작동되고 엄격해진다.
1.
레고라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은 설명서가 표상하는, 질서와 규율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물건이다. 각 부품은 자신의 목적과 역할이 있으며 다른 상상이 개입할 여지는 극히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형태를 가진 미니 피규어의 경우, 다른 도색을 하지 않는 한, 우리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레고 무비>의 주인공 에밋(크리스 프랫)처럼 배관공은 배관공일 뿐인 것이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이제 성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레고는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레고 무비>는 영화의 매체를 빌어 레고라는 물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려고 한다. 아니 재정립하려고 한다는 편이 맞겠다. 이 곳의 레고들은 이제 자유를 향한 투사들처럼 프레지던트 비즈니스(웰 페렐)에 대항한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제기하고 싶은 건, 레고의 이야기가 비단 자신을 이루는 물성에만 저항했냐는 거다. <레고 무비> 속 레고의 이야기는 이야기 바깥의 실사 어린이의 상상이라는 식으로 넌지시 지시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지 어디에도 알려준 바 없다. 아니 오히려 에밋의 실사의 세계로 넘어갈 때의 시퀀스는 이 두 세계가 따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심증을 굳혀준다. 나는 여기서 더욱 나아가 반대의 주장을 하고 싶어 진다. 사실 실사의 세계는 에밋(영화)의 상상이 아니었을까?
이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대결 같기도 하다. 실제의 세계가 극복할 수 없는 규율, 다시 말해 ‘카메라가 물체를 찍는다’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 필연적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는 상상과 존재의 양태들은 애니메이션에 와서 자유로워진다. 실사가 자유로워지려면 CG의 힘을 빌려야 한다. CG로 범벅된 영화는 ‘애니메이션화 된 실사’에 가깝다. 그 누구도 ‘실사화된 애니메이션’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최근의 디즈니 실사 영화들은 ‘리메이크’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레고 무비>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시 한번 영화로 돌아 가보자. 레고의 세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 실사의 세계는 소환되어 프레지던트 비즈니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이용된다. 이는 마치 세계 밖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데우스 마키나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나 <레고 무비>가 실사를 소환한 건 자신의 논리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실사가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에 포섭되었음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의 내러티브를 진행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써 실사는 차용될 수 있음을 보란 듯이 선언하는 것이다. 이로써 <레고 무비>는 실사화 되고 서로 다른 두 장르는 평등하게 기능하게 된다.
2.
그 순간, <레고 무비>는 더욱 위력적인 프로파간다가 된다. 어른들이 영화 밖 프로파간다에 곤혹스러워하거나 조롱할 때, ‘모든 상상은 평등하다’는 영화 안 프로파간다가 되어 우리의 전제가 된다. 어린 시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신뢰성을 의심받는 명제는, <레고 무비>를 통해 다시 한번 작동되고 엄격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