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순, 세상을 가로질러, (무순, 세상을 가로질러, 2019)
<무순, 세상을 가로질러>(2021)를 두고 그동안의 다른 영화들이 한국 사회의 ‘청춘’(혹은 청년세대)의 재현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미디어 안의 청년들은 얼마간 불안함을 내재하고 있는 존재처럼 여겨지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청년들은 언제나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거나 사회 구조 하의 폭력과 억압을 받는 대상처럼 묘사된다. <무순, 세상을 가로질러> 역시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청년 두 명이 나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마치 대칭처럼, <무순, 세상을 가로질러>에 등장하는 두 청춘 권무순과 박태원은 서로를 수식한다. 권무순이 어머니의 부재를 이야기하면 박태원은 아버지의 부재를 이야기하고, 권무순이 옥탑방에 산다면 박태원은 지하에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 즉 세상을 가로지르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들은 같은 업소에서 알바를 하며 생계를 구하고(중간에 갈등을 겪긴 하지만) 함께 서울에서 부산까지 뛴다. 그렇다면 <무순, 세상을 가로질러>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흙수저 청춘의 세상을 가로지르는 연대를 보여주는 작품일까. 물론 그런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나에게는 그들을 바라보는 태도가 사뭇 다른 지점이 눈에 띈다.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뜬금없이 휙 지나가는 순간에 있다. 여행의 중간, 달리는 무순을 카메라는 뒤에서 일정한 속도로 따라간다. 거리가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달리는 움직임만 감각된다. 20초가 채 되지 않는 이 장면은 기술적으로 성취가 뛰어나거나 다큐멘터리 장르만이 가능한 무엇은 결코 아니다. 그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인물을 쫓아가는 속도를 보여 주는, 인물을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를 상징하기에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과거의 장소와 현재의 장소를 동시에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코 인물들을 다르게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살던 집의 공간이나 일하는 공간, 걸어 다녔던 풍경만 달라지며 카메라의 위치는 동일하다. 그들은 같은 자리에 있고 배경만 달라지는 앨범에 서 있는 것만 같다. 그럼으로써 영화 속 인물들이 하는 행위들은 세상이 규정하는 의미로 한정되지 않는다. 세상이 어떤 배경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거창한 명분이나 목적이 아니라 그냥 하고 싶은 걸 해나가며 오로지 나로서 살아갈 뿐이다.
재밌는 건,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영화의 제목처럼 세상을 가로지르는 자신만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세상 또한 그들을 통과하여 인물들을 가로지르는 방식이라고 달리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순이 세상을 가로지르며 무순을 드러낼 때, 세상은 무순을 가로지르며 세상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세상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또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인지하게 된다. 그 종착점은 장소의 기능을 잃은 폐허의 모습이다. 무순의 옥탑방과 일하던 샌드위치 가게처럼, 공간은 세상의 요구에 제 모습을 잃고 소멸한다. 영화는 마치 수정되기 전의 지도처럼 미확정된 시공, 즉 공간이 다른 공간으로 바뀌는 사이의 시간을 기록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도 사이를 돌아다니는, 기록되지 않는 ‘무순들’을 공간에 세워둔다. 그렇게 공간과 존재는 하나의 장면이 되고, 카메라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사이의 시간과 존재들을 보여준다. 청춘을 그리는 또 하나의 초상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